보기는 좋은데 찍기는 어렵네
남도의 노란 유채, 청보리 밭, 연두 바다
《눈은 마음이다. 마음으로 풍경을 본다. 똑같은 바다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의 안경’으로 바라본다. 카메라 렌즈도 똑같다. 그것은 마음의 겹눈일 뿐이다.
마음이 일렁이면 카메라 렌즈도 떨린다. 마음이 고요하면 카메라의 앵글도 담담하다.
색즉시심(色卽是心)이다. 이번 주부터 코오롱스포츠와 함께 매달 한 번씩 ‘포토
트레킹’을 떠난다. 참가자들은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카메라 마니아들. 이들의 렌즈로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위보다 밑을 사랑한다/밑이 큰 나무, 밑이 큰 그릇, 밑이 큰 여자…/그 탄탄한
밑동을 사랑한다//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밑동도 다 넓은 것은 아니지만/참나무처럼
튼튼한 사람,/그 사람 밑을 내려가 보면/넓은 뿌리가 바닥을/악착같이 끌어안고 있다//…//밑이
구린 것들, 밑이 썩은 것들은/내일로 얼굴을 내밀 수 없고/옆 사람에게도 가지를
칠 수 없다//나는 밑을 사랑한다/밑이 넓은 말, 밑이 넓은 행동. 밑이 넓은 일…/그
근본을 사랑한다/근본이 없어도/근본을 이루려는 아랫도리를 사랑한다
<김영남의 ‘밑에 관하여’ 중에서> 》
남도는 한반도의 아랫도리다. 튼실한 밑동아리다. 질펀하고 너른 개펄이 악착같이
바다에 뿌리박고 있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 차르르! 차아∼ 철썩! 끊임없이 이어지는
바닷물 소리, 끼룩대는 갈매기 떼, 눈부시게 부서지는 은빛 햇살…. 그곳은 생명
가득한 이 땅의 자궁이다. 꼬물꼬물 까르르 웃어대는 ‘아기들의 궁전’이다.
김영남 시인(1957∼)의 고향은 전남 장흥이다. 그는 밑이 무쇠 솥처럼 탄탄한
고향 장흥을 사랑한다. 장흥의 개펄과 바람이 그를 키웠다. 소설가 이청준(1939∼2008)도
장흥 앞바다 득량만의 품 안에서 자랐다. 우뚝우뚝한 천관산을 바라보며 문학의 꿈을
곰삭였다. ‘당신들의 천국’ ‘이어도’ ‘눈길’ 등 수많은 작품이 그렇게 나왔다.
장흥은 시인, 소설가의 나라다. 소설가 송기숙(1935∼, ‘녹두장군’), 한승원(1939∼,
‘아제아제 바라아제’), 이승우(1960∼, ‘에리직톤의 초상’) 등과 시인 이대흠,
위선환, 전기철, 문정영 등 귀에 익은 문인만 무려 70여 명이나 된다.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무대는 장흥군 회진면 산저리 일대이다. 이청준
선생이 태어나 자란 곳은 그곳에서 4km쯤 떨어진 진목마을. 그곳엔 작가의 소박한
생가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임권택 감독은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바탕으로 산저리 일대에서 영화 ‘천년학’을
찍었다. 소설에서 ‘학이 날아갈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봉우리’라고 묘사된 곳이
관음봉이다. 관음봉이 바로 학 머리 부분이고, 그 밑 산저마을(山底里)이 선학동인
셈이다.
18일 선학동 일대는 온통 노란색 물결로 출렁였다. 30여 ha(약 10만 평)에 이르는
유채 꽃밭 물결이 어지러웠다. 산 아래 푸른 청보리 밭, 보라 자운영 꽃밭과 어우러져
어찔어찔 멀미가 났다. 푸른 하늘과 연두색 바다 그리고 막 초록물이 올라오는 나뭇잎도
황홀했다.
송윤경 코오롱스포츠 주임(26)은 “눈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카메라에
담기엔 무척 어렵다. 앵글이 안 나온다. 전선이나 가축 키우는 가건물 등이 시야를
가로막아 안타깝다. 영화 천년학에 나오던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도 더러 망가진 것
같다”며 발을 굴렀다.
산저리 최귀홍 이장(53)은 “50여 가구 되는 작은 동네에 요즘 관광객은 말할
것 없고, 사진작가만 하루 수백 명씩 찾아온다. 그런데도 안내판이나 화장실 등 제대로
된 게 없어 죄송스럽다. 이청준 선생이 큰 선물을 주고 가셨는데,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제 몫을 하지 못해 안타깝다. 우선 행정지명에 산저리로 돼 있는 마을 이름부터 선학동으로
바꿀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의 힘이다.
20일은 농사에 때맞춰 단비가 내린다는 곡우(穀雨). 19일 찾은 보성 차 밭은 이른
아침부터 손길이 바빴다. 곡우 이전에 찻잎을 따서 덖어야 하는 우전차(雨前茶) 작업
때문이다. 연한 연두색 찻잎이 참새 혀처럼 1, 2개씩 삐죽 나와 있다. 곡우가 지나면
찻잎이 억세어지고 수도 4, 5개로 불어난다. 그만큼 맛이 덜하고 값도 떨어진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로 예전엔 꿈도 못 꿨던 청명차(4월 5일)까지 보성 차 밭에서
나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한 제주에서나 가능했던 일이다.
포토트레킹 참가자들은 차 밭에 오니 펄펄 난다. 카메라 앵글이 척척 맞아 돌아가니
희희낙락이다. 직장인 배수인 씨(27)는 “새벽 공기도 좋고 날씨도 최고다. 렌즈
각이 너무 잘 나온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연두색 물결과 청자 빛 하늘이 황홀하다.
낯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져 카메라 작업을 해보는 경험도 남다르다”고 말했다.
강진 백련사 동백꽃은 이미 모가지가 통째로 꺾여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너부러진
꽃들은 알을 낳고 죽은 어미 연어처럼 푸석푸석했다. 꽃잎은 멍들어 흙이 묻고 검버섯이
피었다. 붉은 핏빛이 바닥에 낭자했다. 가슴이 짠했다. 동박새는 보이지 않았다.
직박구리들만 아직 매달린 꽃잎 따먹느라 수선스러웠다.
이름 모를 부도에 누군가 갖다 놓은 붉은 통꽃 하나. 돌 위에 핀 붉은 꽃. 다산
정약용 선생과 오솔길을 오가며 학문을 논했던 백련사 혜장선사의 넋인가. 이제 다산도
가고 혜장도 없다. 솔바람만 무심하게 불어온다.
직장인 이강모 씨(50)는 “혜장과 다산 선생이 오갔던 동백나무 오솔길이 너무
좋다. 두 분은 그 길을 오가며 강진만 바다에 해가 떨어지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고,
그러면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나 삶의 부질없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것 같다. 카메라
앵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역사나 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많이 아는 만큼 렌즈 앵글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포토넷 ‘매거진F’의 유호종
기자도 “장소에 대한 정보가 풍부해야 무엇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가 결정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읍내에 있는 영랑 선생 생가에 모란꽃이 활짝 피었다. 귀부인 같이 도도하고
우아한 꽃. 바람이 조금만 불거나 비가 와도 2, 3일을 못 견디는 꽃. 문득 피었는가
하면, 금세 소리 없이 져버리는 진보라 꽃. 과연 영랑문학제(24∼26일) 때까지 꽃이
달려 있기나 할까.
봄 꽃은 우르르 핀다. 매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꽃이 뒤범벅되어 튀밥처럼
핀다. 벚꽃, 라일락, 배꽃, 살구꽃이 앞 다퉈 폭죽을 터뜨린다. 잎도 돋지 않은 마른
가지에 등불처럼 별꽃들을 다발로 매단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모든 봄 꽃이 한
순간에 져버린다. 아침 햇살에 이슬처럼 사라진다.
이때쯤 보랏빛 꽃구름처럼 내려앉은 남도의 자운영 들판도 하나 둘 갈아엎어진다.
그곳엔 물이 채워지고 곧 모가 심어진다. 그렇다. 자운영은 ‘거름 꽃’이다. 썩어서
곡식을 키운다. 봄 꽃들도 떨어져 열매를 맺는다. 모든 봄 꽃은 깃발이다. 아우성이다.
보살이다. 부처다.
장흥,보성,강진=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트레킹 정보|
◇먹을거리 ▽장흥: 신녹원(한정식) 1인 1만5000원, 2만 원. 장흥군청 옆. 061-863-6622
▽보성: 흑산도횟집 061-852-8523 ▽강진: 병영 설성식당(숯불돼지불고기) 4인 한
상 2만 원. 061-433-1282 마량 수협어판장 뒤에 있는 정든횟집, 061-432-0606
◇교통 강진 장흥 보성은 40분 이내 거리에 있다. 일단 서울에서 강진으로 내려가
강진 일대를 둘러본 뒤 장흥→보성 순으로 가면 된다. ▽KTX 서울 용산∼광주 하루
11회 운행(2시간55분 소요),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진행 버스 ▽고속버스 서울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루 6회 강진행 버스(5시간 소요) ▽승용차 서울∼호남고속도로∼광주광산 나들목∼국도
13호선∼나주∼영암∼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