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풍경
“낄낄낄” 소리에 고개 들어 두리번거리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대부분 DMB(디지털
멀티미디어 이동방송) 폰이나 PMP(휴대용 멀티미디어기기)로 코미디 프로를 보는
젊은이들이다. 이어폰으로 조용히 듣다가 웃음보를 참지 못하고 터뜨리는 것은 그래도
양반이다. 아예 외장 스피커로 TV를 보면서 남 신경은 쓰지 않고 낄낄거리는 이도
있으니.
출근길 지하철은 콩나물 시루여서 덜하지만, 다른 때는 지하철에서도 소음과 싸워야
한다. 경제가 어려워서인지 행상도 부쩍 늘었다. 1시간 정도 지하철을 타면 5, 6명은
만난다.
이제는 눈에 익은 ‘스타 행상’도 여러 명이다. 시간이 충분치 않아 지하철에서
책을 보거나 잠을 자야만 하는 사람에게 이들의 목소리는 고역이다. 그렇다고 이
경제위기에 한 푼이라도 벌어보겠다고 얼굴 팔리는 것을 각오한 사람에게 뭐라고
욕할 수도 없는 일이고.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나라라면, 그 역동성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지하철 아닐까? 빵을 먹으며 출근하는 직장인, 휴대전화로 애인과 통화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대학생, 고래고래 술주정하는 노인,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
아, ‘개똥녀 사건’도 지하철에서 일어났었지. 이 역동적 공간에서 입을 헤~ 벌리고
잠자거나 책을 읽는 사람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 아닐까.
최근 TV의 지하철 침범은 얼리어답터가 많은 한국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IT 기기의 발달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TV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일종의 개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하철에서까지 TV의 삼류 프로를 보면서 웃음을 못 참는 젊은이들은
측은해 보인다.
TV는 뇌를 멍하게 만들고 시간을 갉아 먹는다. 외국인의 눈에는 TV를 켜 놓고
말 한마디 없이 저녁을 함께 먹는 한국의 가정이 신기하게 비친다고 한다. TV를 없애면
가정이 살아나고 뇌가 살아나고 시간이 살아난다.
TV 안 보기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TV를 끄니까 할 일이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TV 중독의 현장을 지하철에서도 봐야 하니….
지하철에서 앉아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 엿보인다.
좋은 책을 읽는 사람은 다시 보게 된다. 언젠가 후배 기자가 디자이너, 패션모델
등과 함께 해외 취재를 간 적이 있다. 모델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에 찌~잉 느낌을
받은 후배 녀석이 “독서를 좋아하는가 봐요?”하고 말을 걸었더니, 그 모델 왈 “디자이너
선생님이 책 펴놓으라고 해서요. 그래야 똑똑하게 보인대요.”
모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적어도 내겐.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TV를
보는 사람보다 훨씬 더 지적으로 보인다. 당연히 판타지 소설보다는 철학서를 읽는
사람이 더 우아하게 보인다. 거꾸로 품격 있어 보이는 얼굴의 소유자가 보는 책을
훔쳐보면 대부분 품격 높은 책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전형적인 샌님 스타일의 80대 노인이 경로석에
앉아 돋보기 너머 표지가 닳을 대로 닳은 옛 책을 읽고 있었다. 그 고서(古書)의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 마광수’. 속으로 한참 동안
웃었다.
이성주 코메디닷컴 대표
<이 칼럼은 중앙일보 4월 13일자 ‘삶의 향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