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위반하면 다 위반한다
‘깨어진 유리창’ 이론 실험으로 증명
우체통에서 편지봉투 하나가 삐죽 튀어나와 있는데, 게다가 봉투 속에 든 고액
지폐까지 ‘나를 가져가 달라’는 듯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봉투에는 이 편지를
받을 사람의 주소가 명확히 쓰여 있다. 이럴 경우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똑 같은 돈봉투가 있어도 우체통에 낙서가 그려져 있는지, 아니면 주변에 쓰레기가
있는지 등 주변 상황에 따라 보통 사람들이 돈을 꺼내 가져가거나 아니면 우체통에
곱게 넣어 주는 비율이 두 배나 차이가 난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네덜란드 그로닝겐 대학교 기즈 케이저 박사 팀이 그로닝겐 시에서 통행인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위 실험을 해 봤다. 그 결과 깨끗한 우체통에서는 돈봉투를 가져간
사람이 13%에 불과했다. 대다수가 수신인 이름이 명백히 써 있는 돈을 훔쳐가길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우체통에 낙서를 해 놓았더니 돈을 빼가는 비율은 25%로 껑충 뛰어올랐다.
우체통 주변에 쓰레기를 흩뿌려 놓았을 때도 27%의 행인들이 돈을 빼갔다. 케이저
박사는 “단순히 쓰레기가 주변에 있었을 뿐인데 돈을 빼간 사람이 두 배로 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말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증명
연구진은 이른바 ‘깨진 유리창’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이 같은 실험 6가지를
실시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은 멀쩡하던 건물에 깨진 유리창에 생겼을 때 빨리 새
유리로 갈아 끼워 주면 다른 유리창이 안전하지만 방치할 경우 사람들이 “이 건물은
전혀 관리가 되지 않거나 감시자가 없다”는 생각에 나머지 유리도 연쇄적으로 깰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론이다.
이번 실험을 통해 연구진은 한 사람의 사소한 질서위반이 여러 사람의 질서위반을
연쇄적으로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두 번째 실험은 주차장으로 직행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는데도 사유지라며 옆길로
돌아가도록 지시하는 ‘무단통행 금지’ 표지판이 철제 담장에 부착돼 있는 곳에서
진행됐다. 표지판 밑에 아무 것도 없을 때는 주차장 이용객의 27%만이 지름길을 택했다.
대다수가 ‘얌전히’ 지시를 따른 것이었다.
연구 팀은 이번에는 ‘무단통행 금지’ 표지판 바로 아래에 자전거를 체인으로
묶어 놓았다. ‘이 자전거 이용자는 여기다 자전거를 묶어놓고 바로 지름길로 주차장으로
갔다’는 암시를 준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놀랍게도 87%가 지름길로 직행했다. 자전거 한 대가 무단통행을
3.2배로 늘려 버렸다.
또 다른 실험은 자전거 손잡이에 광고 전단을 끼워 놓고 자전거 주인이 그 전단을
쓰레기통에 버리는지 아니면 길바닥에 던져 버리는지를 체크했다. 연구진이 벽을
낙서로 더럽혔더니 자전거 주인이 전단지를 길바닥에 버리는 비율이 두 배로 높아졌다.
케이저 박사는 “사회의 규칙이 다른 사람에 의해 깨졌다는 사실을 보는 순간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그 규칙에 따르지 않기 쉽다”며 “표지판 등으로 규칙을
지키라고 해 봐야 소용없고, 행동으로 규칙이 지켜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위반이 자행되는 현장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다.
구호-표지판은 아무 소용 없다
케이저 박사는 단순한 구호가 사회질서 확립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례로
90년대 중반 미국 뉴욕에서 진행됐던 ‘관용 제로’(zero tolerance) 캠페인을 들었다.
당시 뉴욕 시는 질서확립을 위해 그 전에 눈 감아 왔던 지나친 구걸 등을 강하게
단속했지만 깨끗한 뉴욕을 만드는 데는 별 성과가 없었다. 뉴욕 시민들은 이를 ‘경범죄와의
전쟁’ 정도로만 받아들였고, 주변에 사소한 위법 행위가 계속되는 것을 보면서 가벼운
위반을 계속했다는 설명이었다.
2003년 영국 교통부에 거리의 낙서 관련 보고서를 제출한 제랄딘 페터슨 역시
“사회 지도층과 시민들이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한, ‘전쟁’ 선언은 선언으로
끝나기 쉽다”고 말했다.
이 연구결과는 과학전문학술지 ‘사이언스(Science)’ 최신호에 발표됐으며, 영국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 등이 20일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