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걷기도사’ 아세요?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신경림의 ‘집으로 가는 길’ 전문>
신정일 씨(54)는 걷기도사다. 우리 땅 구석구석 발길이 안 닿은 데가 없다. 남한 8대강(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만경강 동진강 한탄강)을 발원지에서부터 하구 끝까지 걸었다. 그것도 한강은 3번, 금강 섬진강은 2번씩이나 걸었다. 김포에서 태백까지 한강걷기에는 딱 16일이 걸렸다. 낙동강 16일, 금강 14일, 섬진강 9일, 영산강 5일, 한탄강 만경강 각각 3일, 동진강 2일.
남한 8대강 발원지부터 하구 끝까지 답사
조선시대 옛길 영남대로(부산 동래읍성~서울 남대문), 삼남대로(전남 해남 이진~서울 남대문), 관동대로(서울 동대문~강원 울진 평해)와 동해안 트레일(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개~강원 고성 통일전망대) 걷기도 마쳤다. 그뿐인가. 크고 작은 산들도 400여개나 올랐다. 요즘엔 그가 대표로 있는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회원들과 시도 때도 없이 길을 떠난다.
지금까지 신 씨가 25년 넘게 헤맨 거리는 공식적으로만 1만6000여km. 전국을 무른 메주 밟듯 다녔다. 늑대보다 사나운 개들에게 물릴 뻔한 적도 여러 번, 어디를 가든 국적불명의 개들이 60만 대군보다 많았다. 으르렁거리며 질주하는 화물차에 치일 뻔한 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래도 “용케 살아남아” 굳건히 걷고 있는 게 신통방통하다.
신 씨는 몸이(170cm 60kg) ‘그 정한 갈매나무처럼’ 단단하다. 마라톤 선수 몸 같다. 걸음걸이도 가볍고 날렵하다. 경공술이 강호의 고수처럼 리드미컬하다. 그는 개량 한복차림에 랜드로버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선다. 하루 평균 40km, 시속 5~6km의 빠르기로 걷는다. 배낭 무게 13kg. 잘 곳을 못 찾아 하루 64km를 걷다가 기진맥진한 적도 있다.
“사흘만 걸으면 보약 한 제 먹는 것보다 낫다. 처음엔 근육이 적응 할 수 있도록 천천히 걷는 게 좋다. 사나흘 지나면 다리근육에 힘이 붙는 것을 느낀다. 이때부터는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그냥 가면 된다. 오래 걷다보면 여기저기 통증이 있기 마련이지만, 일단 몸을 움직여 걷다보면 씻은 듯이 사라진다. 난 평생 병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다. 건강진단이니 하는 번거로운 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루 세끼 뚝딱 잘 먹고, 시원하게 변을 잘 누는데 뭐가 문제이겠는가?”
책 가득 찬 27평 아파트는 ‘행복한 책 감옥’
신 씨는 초등학교 이후 학교문턱을 밟은 적이 없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다. 교복 입은 친구들만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저 책 걸신에 들려 닥치는 대로 활자에 코를 박고, 읽고 또 읽어댔다. 행상하는 어머니를 도우면서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중 고등학교 과정은 검정고시로 마쳤다.
한때는 출가도 해봤지만 두 달 만에 ‘귀향조치(?)’ 당했다. 25살 무렵 막노동으로 공사판을 헤맸다. 일당 4만원. 그 돈으로 책을 사서 게걸스럽게 외우고 뼈에 새겼다. 결국 그를 키운 건 팔 할이 책과 산, 들, 바다였다.
그가 읽은 책은 과연 얼마나 될까? “1만 권인지 2만권인지…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냥 책 읽고 뭔가 하나라도 얻었으면 그만이지…”
전북 전주 덕진동에 있는 27평 아파트는 그의 집필실이자 서재다. 3개의 방뿐만 아니라 거실 창고 등 책이 가득가득하다. 방바닥 여기저기에도 책이 걸려 발 딛기도 힘들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무아지경 책 속을 거닌다. 그리고 뭔가 떠오르면 수시로 끼적인다. 아내와 아이들(2남 1녀)이 사는 살림집은 다른 곳에 있다.
그는 걷지 않는 날엔 아침 8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꼬박 즐거운 책 감옥에 갇혀 있다. 하루 1~3권 책읽기는 보통. 그는 지금까지 무려 책을 35권 넘게 썼다. 베스트셀러도 많다.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다. 뭐든 물어보면 척척 답이 나온다. 검색이 필요 없다. 가히 ‘인간포탈’이라고 할 수 있다.
“난 강가를 따라 걸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강은 인생과 비슷하다. 강은 수많은 우연을 거쳐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다. 강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서, 단맛 쓴 맛 모든 것을 경험한다. 강물 소리엔 삼라만상 모든 소리가 녹아있다. 난 아마도 책이 없었으면 이 세상에서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낮엔 늘 지상의 길을 걸었고, 밤엔 책 속을 거닐었다. 자연 속을 걸을 땐 그 속에서 수많은 책을 읽었고, 책 속을 걸을 땐 거기에서 새소리를 듣고, 붉은 노을을 보았다. ‘좋은 책은 도끼로 나의 두개골을 내려치듯 한다’는 카프카의 말에 절대 동감한다.”
신 씨의 꿈은 강해설사. 강해설사는 그가 만든 말이다. 강물 따라 걸으며 사람들에게 거기에 얽힌 역사 문화 등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사람. 그는 “설악산, 지리산은 국립공원이 되는데, 왜 한강 낙동강은 안 되는가?”라고 반문한다. 5대강을 특별문화재로 지정하고 ‘5대강박물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해안 1300㎞ 코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황홀
신 씨는 이제 반쪽 남한 땅이 너무 좁다. 북한의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청천강 예성강을 따라 걷고 싶다. 의주로(서울~신의주)를 따라 만주를 거쳐, 연암 박지원이 갔던 열하까지 걷고 싶다. 동해안 트레일의 나머지 구간(강원 고성 통일전망대~두만강 녹둔도)도 하루빨리 잇고 싶다.
“설악산 금강산 명사십리 칠보산 등 굽이굽이 절경인 동해안 트레일 1300km는 세계 최고의 걷기 코스다. 스페인 산티아고 800km 순례길보다 몇 배나 더 황홀한 길이다. 남북이 합의만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개발할 수 있다. 우선 남한 쪽의 절벽이나 공장 등 때문에 끊긴 길부터 잇는 게 중요하다. 지방자치들이 협력해서 여행자 숙박업소도 짓고, 인증서도 발급해준다면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도반(道伴) 즉 길동무다. 도반은 앞에 가던 사람이 뒤처질 수 있고, 뒤에 가던 사람이 앞설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다투지 않는다. 뒷덜미를 잡아채거나, 등 떠밀지 않는다. 그냥 강물처럼 묵묵히 아래로 흐를 뿐이다. 신정일 씨도 그렇게 ‘흐르는 강물처럼’ 담담하게 흘러간다.
◎ 신정일 선생이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
① 충주 목계나루에서 섬강이 남한강과 만나는 원주 흥호리까지의 남한강 길
② 경북 봉화 이황선생이 걸었던 청량산에서 도산서원에 이르는 퇴계 오솔길
③ 전남 구례 피아골 입구에서 경남 하동까지 섬진강 길
④ 강원정선군 광하교에서 나리쏘까지 남한강의 절경 동강길
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선유구곡에서 화양구곡까지 길
⑥ 전남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에서 월출산 아래 누릿재 넘어 영암읍까지 삼남대로 길
⑦ 문경새재 길
⑧ 강원도 양양군에서 홍천으로 넘어가는 구룡령 옛길
⑨ 전북 임실 덕치섬진강 진메 마을에서 순창군 동계면 평남리까지 섬진강 길
⑩ 평창 대관령 넘어 관동대로를 따라 가는 길
⑪ 남강상류 화림계곡 거쳐 함양상림에 이르는 길
⑫ 경남 통영 미륵섬 일주 길
⑬ 전북 고창 해리에서 선운산 넘어 선운사 가는 길
⑭ 전북 부안 내변산에서 직소폭포 거쳐 내소사에 이르는 길
⑮ 강원 삼척 용화해수욕장에서 임원을 거쳐 호산리까지 가는 길(관동대로 차마고도)
◎ 신정일 선생이 쓴 주요 책들
◇땅과 길
▼다시 쓰는 택리지1, 2, 3, 4, 5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 1.2.3
▼영남대로
▼삼남대로
▼대한민국에서 살만한 8곳
◇강
▼금강 401km
▼섬진강 따라 걷기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
▼신정일의 낙동강 역사문화탐사
▼강 따라 역사 따라
▼한강 따라 짚어 가는 우리 역사
▼금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섬진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산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
▼나를 찾아가는 하루산행 1,2
▼산 따라 역사 따라
◇역사
▼지워진 이름 정여립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
▼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
▼한국사의 천재들(이덕일 김병기 공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이덕일 김병기 공저)
◇기타
▼울고 싶지? 그래 울고 싶다
▼섬 따라 역사 따라
▼우리에게 산하는 무엇인가
▼자꾸만 그곳에 가고 싶다
▼풍류, 옛 사람과 나누는 술 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