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스타 의사들이 설립한 국내 첫 학회는?

[Voice of Academy 16-학회열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지난달 27일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라는 주제로 의사와 회복된 환자들이 소통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학회는 학술활동뿐 아니라 환자, 정부 등과 소통하며 국민의 정신건강을 지키고 있다. [사진=대한신경정신의학회]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1945년 광복 한 달 뒤 국내 의학계에서 처음으로 출범해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정신질환의 편견과 싸워온 학회다.

구한말까지 각종 정신질환은 ‘귀신들린 병’으로 치부됐고 개화기 의료선교사들에 의해 정신의학이 소개됐지만, 정신건강의학과 클리닉의 문턱이 지금처럼 낮아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학회는 마음의 병이 치료될 수 있도록 정부, 언론, 환자 등과 대화하며 성장해왔다.

학회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에게 지식과 교양을 심겨준 ‘스타 의사’들을 중심으로 닻을 올렸다. 1945년 9월 1일 서울 연건동 경성대부속병원에서 당대의 ‘스타 의사’ 명주완(1905~1977) 박사를 중심으로 신경정신과와 제3내과 의사 10명이 모여 조선정신신경학회란 이름으로 출범한 것. 제3내과 의사들이 합류한 것은 일본 의사 시노사끼가 신경학을 전공한 내과의사여서 그의 제자들이 다른 의사들보다 신경정신의학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

경성대 의학부 부속병원 초대원장이면서 신경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였던 명주완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제대 출신 조선인 의사들의 모임인 ‘낙산의학’ 창립을 주도했고 언론에 에세이를 기고하며 의학의 세계를 알린 당대의 스타 의사였다. 그는 부회장을 맡고 ‘조선 최초의 정신과 의사’ 심호섭(1890~1973) 박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심 박사는 1908년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에 입학해 조선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를 우등 졸업한 뒤 국내 첫 정신과 의사가 된 입지전적 인물. 경성의전의 첫 한국인 교수로 임명됐지만 민족차별에 반발, 세브란스의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브란스의전에선 호주 출신의 의료선교사 찰스 맥라렌(마라연·馬羅連) 박사가 신경정신과를 만들어 진료를 보고 있어 심 박사는 내과를 맡았다.

맥라렌 박사의 첫 제자 이중철(1904~1945) 박사는 스승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일제에 의해 추방되자 세브란스의전 신경정신과 주임교수를 맡았고 나중에 스승의 부름을 받고 호주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해방을 눈앞에 두고 숨졌다. 따라서 경성대의 두 스타 교수 심호섭, 명주완이 학회를 이끌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심호섭은 나중에 조선의학협회 초대 회장, 서울대 의대 초대 학장 등을 역임했고 명주완은 대한의사협회 회장과 조선대 병원장 등을 지냈다.

학회 초기엔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뒤 경성제대 의학부 신경정신과 교실에서 근무하다 ‘청량리 언덕 위 하얀집’ 청량리정신병원을 경영한 최신해(1919~1991) 박사, 군진정신의학의 기초를 닦았고 예술치료학회를 만들어 사이코드라마를 치료에 도입한 유석진(1920~2008) 박사, 평양의전 출신의 한국 최초 정신분석가 김성희(1917~2003) 박사 등이 ‘인텔리 의사’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최신해 박사는 한글학자 최현배의 아들로 1998년 학회는 그를 기려 ‘최신해 학술상’을 제정했다.

학회는 1955년 6월 대한신경정신의학회로 이름을 바꿨고 1964년 세계정신의학협회(WPA)에 가입해 국제적으로 학문 교류를 시작했으며 미국정신의학협회(APA)와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학회는 1962년 4월 《신경정신의학》을 창간해 현재 매년 4회 발간하고 있으며 2004년부터는 영문학술지 《Psychiatric Investigation》도 펴내고 있다.

원래는 정신과와 신경과가 한지붕 아래 있었지만 1982년 대한신경과학회가 출범하면서 신경과에서 신경정신과의 진료과 이름을 바꿀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 진료과 이름을 정신건강의학과로 바꿨지만 학회 이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학회는 정부 정책 수립에 협력해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대정부, 대국민 활동에도 방점을 두고 있다. 특히 2008년 대한정신건강재단을 설립, 가난한 정신질환자들을 돕고 정신질환자 자녀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며 ‘우울증 선별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또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2010~2012년 대한정신분열병학회와 함께 ‘정신분열병’을 ‘조현병(調絃病)’으로 바꾼 것은 국제 의학계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현재 대한신경정신과학회는 한국정신치료학회, 한국분석심리학회 등 전문 연구학회 23개와 지부학회 22곳을 총괄하는 매머드 학회로 성장해 4700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하고 있다. 종교계 및 지방자치단체의 자살예방센터, 지자체의 정신건강복지센터, 치매센터, 해바라기센터(성폭력피해자통합지원셍터) 등에 학회 소속 전문의들이 참여해 정신질환자들의 마음을 달래고 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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