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조 원 포기하고 수백만 명 구한 의학자
[이성주의 건강편지]
1955년 4월 12일 미국 전역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국민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10주기(週忌)에 그의 하반신을 마비시켰던 소아마비, 정확히는 폴리오의 백신 임상시험이 성공했다는 기자회견 소식이 울려 퍼진 것입니다.
냉전시대였던 20세기 중반, 소아마비는 ‘핵폭탄’ 못지않은 공포였습니다. 미국에선 1952년 한 해만 해도 5만 8000명에게서 발병, 3145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2만 1269명의 하반신을 마비시켰습니다. 아이들이 주로 희생돼 ‘소아마비’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어른도 안전하지 않았지요. 루스벨트도 39세 때 감염됐습니다.
1914년 오늘(10월 28일)은 폴리오 백신을 개발, 인류를 구원한 조너스 솔크가 미국 뉴욕시 할렘가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던 러시아계 유대인 부모의 첫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솔크는 16세 때 가난한 집안의 영재들을 위한 공립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뉴욕시립대 화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는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변호사를 꿈꾸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권유로 의사의 길을 갑니다. 어렸을 때 여름방학이 끝나면 다리가 마비돼 금속보조장치를 하고 나타난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밟힌 것도 진로 결정에 한몫 했습니다.
솔크는 뉴욕대 의대를 졸업, 마운트 시나이 병원에서 수련 과정을 거친 뒤 미시간대의 토머스 프랜시스 교수 연구실에서 독감 백신에 대해서 배웁니다. 1947년 피츠버그대 의대 바이러스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루스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소아마비 국립재단’이 후원한 폴리오 백신 연구에 몰두합니다. 6년 동안 휴일을 잊은 채 하루 16시간씩 실패를 거듭하며 연구, 1953년 3월 26일 폴리오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미국의학협회지》에 발표합니다. 그해 11월부터 자신과 연구원들, 가족, 지원자를 시작으로 임상시험에 들어갔고 1년 반 만에 미시간대에서 임상시험의 성공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펼쳤습니다.
그는 제약회사들의 ‘독점 제안’을 거절하고 제조법을 세계에 무료로 공개합니다. 덕분에 지구촌에서 폴리오는 급격히 줄었습니다. 미국에선 2년 만에 환자가 80% 이상 격감했습니다. 언론에선 그가 사익을 추구했다면 최대 8조 원을 벌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솔크는 “내가 지금까지 번 돈으로 사는 데 지장이 없다.”며 공익을 추구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솔크에게 특별한 원천기술이 없기 때문에 특허 수익이 미미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익을 추구했다면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을 것은 명백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솔크연구소를 설립해 과학자들의 연구를 도왔고, 지구촌의 기아와 질병을 퇴치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의학과 인문학을 결합하는 활동도 펼쳤습니다. 56세 때엔 파블로 피카소의 전 부인이었던 화가 프랑수아즈 질로와 결혼하면서 예술로까지 관심 영역을 넓혔습니다.
솔크는 주류 과학자와 마찰을 빚곤 해서 노벨상을 받지도, 미국과학한림원(NAS) 회원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자유훈장, 의회명예황금훈장 등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그 어떤 과학자 못지 않은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라디오에 백신의 임상시험 성공을 발표한 그날 밤 CBS 방송의 ‘See it Now’에서 스타 앵커 에드워드 머로와의 인터뷰는 언제 들어도 새뜻하고, 가슴을 울립니다.
“특허는 누가 소유하는가(Who owns the patent on this vaccine)?” -머로
“글세, 사람들이다. 나는 ‘특허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태양에 특허를 낼 수 있는가(Well, the people, I would say. There is no patent. Could you patent the sun)?” -솔크
1782년 10월 27일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가 태어난 날이네요. 강주미(클라라 주미 강)의 연주로 카프리스 24번 듣겠습니다. 카프리치오, 광상곡, 기상곡 등으로 불리는 카프리스는 즉흥성이 강한 기악 소품을 이르는 말이죠? 파가니니의 카프리스는 결코 쉽지 않은 곡인데, 강주미의 연주,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 않나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