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맴도는 '한미약품 시총 200조원'
"주주총회를 통해 뜻을 이룰 수 있게 된다면 1조원 이상 투자를 유치하고, 바이오의약품 개발 전문회사로 거듭나겠습니다." "한미약품 시가총액 200조원대를 달성하겠습니다".
임종윤 한미약품 사장은 21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주주총회를 통해 경영에 복귀해 미래 한미를 가꿔 나가겠다는 비전을 내놓은 것이다.
앞서 1주일 전에도 임 사장은 '5년 안에 순이익 1조원, 시가총액 50조원대 진입'을 담은 '한미 미래 전략'을 내놓은 바 있다. 이날 비전은 그 연장선이자 보충설명이었다.
한미약품그룹과 OCI의 통합을 주도한 송영숙·임주현 모녀에 맞서 온 임종윤·종훈 형제는 현재 사활을 건 경영권 승부를 벌이고 있다. 통합이 부당하다는 취지의 가처분 신청을 내고, 본인들의 정당성과 미래 비전을 전파하는 등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급하고 다급했기 때문이었을까. 구체성이 떨어지는 포부와 주장을 내놓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마어마한 숫자를 제시하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시총 언급만 봐도 그렇다. 국내에서 시총 200조원이 넘는 회사는 삼성전자(21일 종가 기준 473조4000억원)뿐이다. 시총 2위 SK하이닉스는 123조7000억원대이고, 현대차(53조원대)와 기아(46조원대)를 합치면 100조원 정도다. 제약·바이오업계로 좁혀서 보면 삼성바이오로직스(61조원)와 셀트리온(40조5000억원대) 시총을 합친 숫자가 100조원을 겨우 넘는다. 시총 200조원은 국내 최고 우량기업 몇 개를 합쳐도 남을 숫자다.
장기 비전이라고는 하지만 200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꺼내려면 설득력있는 실천 전략도 내놓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임 사장은 "시가총액 200조원대에서 왔다 갔다 하는 글로벌 제약회사들을 보면서 자신감이 생겼다"며 "1조원의 투자 유치금으로 바이오공장을 짓기만 한다면 시총 200조원 회사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미약품 전체 영업이익을 20~30%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다. 북경한미를 사례로 들면서 "북경한미 전체의 지난해 수익률은 25%다. 저희가 경험했던 수익률과 사업운영 경험을 그룹 전체로 확대시키겠다"고 했다.
그룹 전체 이익률을 높이겠다는 주장의 근거는 사실상 북경한미 실적 뿐이었다. 중국과 한국의 여건이 다를 뿐더러 북경한미와 한미약품의 포트폴리오가 다른데도, 구체적인 계획은 내놓지 않았다.
또한 이날 형제는 수차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임 사장은 "위대한 유산은 사람이며 그간 450개의 화학 의약품을 만들어본 한미약품의 경험이 사람들에게 축적돼 있다"며 "이들을 다시 불러모으겠다"고 했다. 한미 DNA가 담긴 인재들을 다시 불러 모으겠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구체적이진 않았다. 확정된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대략적인 그림은 있지만 어디에 누구를 영입하겠다거나 하는 계획은 아직"이라고 답했다.
'5년내 순이익 1조원' '시가총액 200조원' 같은 숫자들은 웅대하고 멋지다. 하지만 연결성이 희미한 숫자는 그저 허공에 맴돌 뿐이다. 구체적인 계획과 객관적인 데이터가 연결돼야 숫자는 비로소 빛을 발한다. 임종윤·종훈 형제가 당장 급한 마음에 실체 없는 비전을 남발하는 것은 아닌지 왠지 불편하다.
이날 기자간담회가 끝난 뒤 경영권 다툼의 상대방인 한미그룹도 "임종윤 측 시총 200조 가능 주장, 현실성 없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놨다. 이 자료에서 "도전적이지만, 역설적으로 매우 비현실적이고 실체가 없으며, 구체적이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창업주 '임성기 평전'과 '한미약품 50년사' 출간에 관여한 직원의 글을 소개했다. 거기엔 고(故) 임성기 회장이 생전에 임직원들에게 전했다는 몇 가지 지시와 주문이 담겨 있다.
"겉모양만 번지르르한 보고서 말고, 한 장짜리라도 좋으니, 알맹이로 꽉 채워서 보고하라."
"그래 이걸 해내려면 말이야, 우리가 지금 가진 건 뭐고 당장 해야 할 일이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