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확대...또 서울, 미용·성형으로 몰리면?

[김용의 헬스앤]

의대 정원 확대는 필수 의료 및 지방 의사 증원을 보장하는 세밀한 정책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아울러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의료 수가 인상 등 다양한 지원책이 뒷받침돼야 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어떻게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세요? 건강은 괜찮으세요?”

우연히 의사들의 대화를 듣는 기회가 있었다. 응급의학과 의사(대형병원)가 명절에도 쉬지 않고 병원에 나왔다는 얘기를 하자 다른 과의 의사가 ‘위로’를 건넸다. 내가 “의사를 늘리면 되지 않나요?” 물었더니 “티오(TO-규정에 따라 정한 구성원 수)가 정해져 있어 어렵다”고 했다. 장기간 의사 정원이 묶여 있어 소수의 의사들이 명절에도 응급 환자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티오를 바꾸면 되지 않나요?” 했더니, 의사는 ‘현실을 너무 모른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의사 부족... 지방 의료 붕괴 위기, 위급 환자들 응급실 뺑뺑이

정부 여당이 의대 정원을 2025학년도 대입부터 크게 늘린다는 소식이다. 의사 부족이 심각해 지방 의료는 붕괴 직전이고, 소아과·외과·응급의학과 등 필수 의료 분야의 응급 환자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지방에선 임신부들이 출산을 위해 대도시 종합병원 근처에서 하숙을 한다. 고령화로 심혈관 질환은 급증하고 있는데 수술할 흉부외과 의사는 갈수록 줄고 있다. 그런데도 의사들은 서울-수도권으로만 몰리며 자신의 전공을 버리고 미용·성형으로 갈아타고 있다. 지방을 넘어 대한민국의 의료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수도권 대형병원 사정도 녹록지 않다. 입원 환자를 돌보는 전공의들이 줄어 비상이다. 가뜩이나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는 전공의에게 과거처럼 병원에서 숙식하며 환자를 돌보라고 강요할 수 없다. 병원들은 입원 환자를 보는 입원 전담 전문의 구인에 나서지만 교수 수준의 연봉에도 구하기 어렵다. 직업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이유가 있지만 힘든 근무 여건도 한몫하고 있다. 의사가 부족하니 대형병원도 야간 입원 병동을 힘겹게 운영하고 있다.

동네병원 경쟁 치열, 서울 대형병원은 분원까지... 개원의 위기감 증폭

의사 부족 현상은 현장 의사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네병원(개원의)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서울의 대형병원들이 수도권 분원까지 추진하는 상황에서 개원의들의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토요일 오후까지 일하는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에도 수익 악화로 고민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환자를 불친절하게 대했다간 벌점 테러까지 당하기도 한다. 여기에 의사 숫자마저 크게 늘어날 경우 병원 운영이 더욱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거의 사라진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 반면교사 삼아야

의대 정원 확대는 필수 의료 및 지방 의사 증원을 보장하는 세밀한 정책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아울러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의료 수가 인상 등 다양한 지원책이 뒷받침돼야 한다. 무턱대고 의사 숫자만 늘렸다가 오히려 서울 쏠림, 미용-성형 등 특정 과 집중 현상이 심해지면 큰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 야심차게 출범했던 의전원은 지금은 대부분 자취를 감춘 상태다. 당시 의전원 입학생 가운데 의사과학자 대신 동네병원 의사를 선택한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가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뒤처진 것은 우수한 의사과학자가 적은 탓도 있다. 의대 졸업생들은 지금도 “동네병원 의사 수만 늘렸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삶의 질 열악하고 의료분쟁에 경영난... 생명 살리는 필수 의료 외면 왜?

젊은 의사들이 과거 의대 1등이 선호하던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를 외면하고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 ‘정재영’(정신건강의학과-재활의학과-영상의학과)으로 몰리는 이유는 ‘삶의 질’ 과 관련이 있다. 수술하다가 의료 분쟁에 휘말리면 소송 등으로 큰 돈을 날리고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 있다. 삶이 망가지는 선배 의사들을 보면서 생명을 다루는 필수 의료를 기피하게 된 것이다. 연봉 5억 원에도 지원자가 없는 병원은 책임은 막중하고 소신 있게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곳이 많다.

젊은 의사들은 응급 수술 없고, 밤 당직 없고, 의료 소송 없는 분야를 선호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의대를 갓 졸업한 새내기 의사들이 전문의가 되기 위한 인턴(1년), 레지던트(3~4년) 과정을 아예 건너뛰고 대거 미용 의료로 빠져 나간다는 것이다. 보톡스, 필러, 피부 레이저 등 미용 의료 시술을 하면서 월급 1000만원 이상을 받으니 어렵고 힘든 전공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 분야로 직행하는 것이다.

필수 의료, 지방 의료 구하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의

생명을 살리는 필수 의료를 구하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의(大義)가 됐다. 대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큰 도리를 말한다. 필수 의료 지원 얘기가 나온 것이 20년이 넘었지만 현실은 그대로다. 아니, 더 열악해지고 있다. 한밤 중에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사망하는 사례도 자주 나오고 있다. 지방은 필수 중증 의료 분야 의사를 못 구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지금이 한국 의료의 최대 위기라는 말도 나온다.

필수 의료 의사에 대한 보상을 크게 늘리고 의료 분쟁 시 기금 활용 등 의사 개인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서울-수도권 쏠림도 대폭 완화해야 한다. 아프면 너도나도 서울 큰 병원으로 가는 것은 지역 간의 의료 질 차이 때문이다. 지방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들을 대폭 지원해서 지역에 뿌리를 내려도 어느 정도 생활 여건에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의사 정원 티오(TO) 왜 못 깨나... 국가도, 병원도, 의사도 바꿔야 산다

글의 첫머리 사례인 응급의학과 의사 티오는 바꾸면 된다. 경영을 책임진 병원 오너의 결단과 다른 과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필수 의료 분야 지원은 다른 과에서도 적극 도와야 가능하다. 명절에도 일한다고 의사들끼리 말로만 위로하면 안 된다. 정부는 전문의 양성에 적극적인 투자를 병행해야 인력의 재배치를 주도할 수 있다. 의대 정원 확대는 정부뿐만 아니라 의사들에게도 많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난마처럼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모두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이제 시간이 없다.

    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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