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은 어디 가나...‘의사과학자’는 명퇴 걱정?

[김용의 헬스앤]

말로만 ‘연구하는 의사’를 외치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 직업 안정성과 처우 개선이 가장 중요하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대학 입시 때마다 의대가 이공계 최우수 학생들을 블랙홀처럼 흡수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고교 최우등생들이 의대로만 몰려 기초과학과 세계 1위 전자 강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걱정이다. 반도체, 스마트폰, TV, 세탁기 세계 1위를 일궈낸 이공계를 외면하고 너도나도 의사 가운만 입으려고 한다. 의대 최우수 졸업생들은 어느 분야를 지망할까?

의대생들은 의대 공부가 고3 생활의 연속이라고 입을 모은다. 학점이 좋아야 인턴과 레지던트 선발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진료과에 가기 위해선 학점과 의사국가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확보해야 한다. 최우수 의대생들은 이른바 ‘인기과’를 지망하는 경우가 많다.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재-영’(정신건강의학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등이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개원이 쉽지 않은 ‘흉-비-외-산’(흉부외과, 비뇨기과, 외과, 산부인과)은 매년 정원 미달이 속출한다. 과거 의대 수석 졸업생들이 지망하던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필수의료 분야도 외면받고 있다. 의대 인기과도 사회 흐름에 큰 영향을 받는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산부인과, 소아과가 맥을 못추고 있다.

일과 개인의 삶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워라밸’은 의사도 예외가 아니다. 힘들고 의료 분쟁이 많은 진료과는 ‘기피과’가 된지 오래다. 업무 스트레스가 적고 두둑한 수입이 보장되는 분야로 몰린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이어서 젊은 의사들만 탓할 수도 없다.

과거 선배들은 환자의 피를 뒤집어쓰며 응급수술을 하는 의사들을 첫 번째로 꼽았지만 지금은 ‘메디컬 드라마’의 한 장면일 뿐이다. 가급적 피를 덜 보고 수입이 좋은 진료과가 1순위다. 젊은 의사들이 특정 진료과만 선호하면서 필수의료 분야의 의사 부족이 현실화하고 있다. 정부도 필수의료의 의료수가를 올리는 등 여러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필수의료 의사 증원 못지않게 의사과학자 양성 문제도 큰 과제다. 코로나19 유행 초기 우리는 백신과 치료제 부족으로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다. 정부 고위관계자가 외국 제약사에 백신 공급을 통사정하는 모습은 아직도 익숙한 장면이다. 한동안 ‘백신 외교’라는 말도 유행했다. 국민들은 국산 백신 개발에 기대감을 높였다가 이내 실망했다. 스마트폰 개발처럼 금세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코로나가 주춤하면서 이젠 국산 백신 얘기도 쏙 들어갔다.

감염병 백신이나 신약 개발의 중심에 바로 의사과학자가 있다. 의사과학자(MD-ph.D)는 의사이면서 연구개발에 역점을 두는 과학자다. 환자 진료 경험을 활용해 바이오헬스 산업에 참여하고, 연구로 쌓은 데이터로 환자를 효율적으로 진료할 수 있는 융합형 인재들이다.

미국의 경우 미국국립보건원(NIH)의 주도로 의대생의 4% 정도를 의사과학자로 육성하고 있다. 미국의 화이자와 모더나는 의사과학자들의 지원 속에 신속하게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해 세계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섰다. 한국도 뒤늦게 백신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턱없이 부족한 의사과학자 숫자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희귀질환의 원인 유전자를 연구하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해 환자의 상태를 신속하게 진단하는 연구도 의사과학자의 영역이다. 치매 치료도 이들의 과제다. 의사로서 이공계의 다양한 분야와 협력하면서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는 ‘중간 다리’가 바로 의사과학자다. 의료계와 바이오헬스 산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재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고교 1등 졸업생들이 이공계 대학을 기피하듯 아직은 의대 졸업생들이 선호하는 분야는 아니다.

세계 각국의 감염병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감염병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그 때 가서 또다시 ‘백신 타령’을 할 순 없다. 미국처럼 의과학자를 대거 양성해 생화학 등 이공계와 접목할 수 있는 융합형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 하지만 정작 젊은 의사들은 일생을 의사과학자로 살다가 의사로서의 메리트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을 한다. 의사가 아닌 과학자로 살기엔 직업 안정성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이공계 위기’도 명퇴 위기감에서 출발했다. 의사처럼 면허가 없으니 기업에서 ‘잘리면’ 한창 돈이 들어갈 나이인 40~50대에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이런 현실 때문에 과학자 아버지가 공부 잘하는 자녀에게 의대를 권하는 것이다.

의사과학자들이 진료 의사들처럼 70세에도 연구실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의대 교수는 65세 정년퇴직 이후에도 병원을 옮겨 진료를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이공계는 대학 정년 이후에는 연구활동을 중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에 자리를 잡으면 그나마 낫다. 그러나 정말 ‘하늘의 별 따기’다. 대기업 연구직 과학자들은 60세 정년도 보장되지 않는다. 40세만 넘겨도 명퇴를 의식해야 한다. 그때서야 힘들게 박사학위 따고 과학자 된 것을 후회한다.

의사 면허가 있어도 평생 과학자 업무에 전념하다가 도중에 그만두면 동네병원 개원도 쉽지 않다. 스톡옵션 등으로 대박난 극소수만 제외하곤 처우도 만족할 수준이 아니다. 나이들어 개원할 경우 비용도 많이 들어간다. 자칫하면 빚더미로 고생할 수 있다.

정부와 의대 관계자들은 이공계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말로만 ‘연구하는 의사’를 외치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직업 안정성과 처우 개선이 가장 중요하다. 진료만 하는 임상의사 동기보다 크게 뒤처지면 누가 의사과학자를 지망하겠는가.

과학자의 길은 의사 면허를 가져도 ‘주저’의 대상이다. 냉엄한 현실이 머뭇거리고 망설이게 한다. 일부 대기업들이 이공계 인재들을 젊을 때만 쓰고 나이들면 버리는 40~50대 ‘명퇴 카드’가 한국 과학의 미래에 엄청난 독이 되고 있다. 과학자, 의사과학자가 더이상 ‘소모품’이 되게 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그들의 축 처진 어깨를 보듬어야 한다.

    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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