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한순간 벌러덩! 밀려오는 평화!
밤새 전국 곳곳에 눈. 충남 전북산간엔 한 ‘길(어른 한 사람의 키 길이)’이나 내린 길눈(잣눈•尺雪). 장독대 복슬복슬 복눈. 목화솜처럼 펄펄 함박눈. 말갈기처럼 거칠게 몰아치는 갈기눈.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눈. 밤새 남몰래 쌓인 도둑눈. 가늘고 성긴 포슬눈. 초겨울에 푸슬푸슬 풋눈. 마른 새우처럼 물기 없는 마른눈. 살짝 얇게 깔린 살눈. 히말라야 만년설의 맑고 깨끗한 숫눈. 밀가루처럼 뿌려지는 가루눈. 발자국 살짝 찍히는 자국눈. 은빛 부스러기 흩날리는 싸라기눈….
눈길 미끄럼 조심!! 어찔어찔 중심을 잃어 어지러운 날. 뚱뚱한 옷차림에, 두 손 호주머니에 넣고, 엉금엉금 가다가, 아차! 한순간에 벌러덩 넉장거리로 나뒹군다. 노랗고 아득한 하늘. 온 몸에 스르르 힘이 빠지고, 눈앞에 우수수 떨어지는 별 부스러기. 입안에 씹히는 찝찔한 핏물. 나도 모르게 그렁그렁 맺히는 ‘마른 눈물방울들’.
그렇구나! 내가 너무 오랫동안 뻣뻣하게 서서 살아왔구나!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천방지축 제멋대로 날뛰었구나! 문득 눈밭에 누워보니 ‘강 같은 평화’가 밀물처럼 밀려온다. 바다 같은 충만함이 잔잔한 윤슬로 뒤척이며 반짝인다.
‘바다’는 ‘바닥’이다. ‘바닥’이 억만년 닳고 닳아 ‘ㄱ’을 지우고 마침내 ‘바다’가 되었다. 이 세상 단 맛, 쓴 맛, 신 맛 등 모든 것들을 품안에 오롯이 받아들여, 가장 낮은 곳에서 장엄한 화엄세상 ‘짠맛’을 꽃피웠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무한대로 ‘받아’줘서 ‘바다’가 되었다.
<김화성 칼럼니스트>
[사진= Stanislav Photographer/sh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