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발 아래” 프로이센 한때의 자부심 충만
●이재태의 종 이야기(9)
쾰른 대성당의 황제의 종
‘황제의 종’이라 불리는 이 종은, 독일 쾰른 대성당에 있었던 거대한 ‘독일 황제의 종(Kaiser glocke)’을 작게 복제한 은도금 황동종(높이 13.5cm, 지름 8.5cm, 무게 304gm)이다. 1890년 독일의 장인인 ‘헨쇤’이 만들었고, 당시 귀족과 군인, 그리고 공적을 세운 국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손잡이에는 독일제국의 문장(紋章)인 독수리 머리장식과 기독교 성인(聖人)들의 두상이 조각되었고, 몸체에는 꽃무늬 문양 장식에 독일어로 황제와 독일 국민을 찬양하는 문구가 양각되어 있다. 내용은 ‘나는 황제의 종으로서, 황제의 명예를 찬양하고 그의 거룩한 말씀을 지지하며, 독일국민과 신께서 그들에게 준 평화와 가호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1890년 5월 20일 헨쇤 제작’(The Kaiser's Bell I am called, The Kaiser's Honor I praise, On Holy Ground I stand, I pray for the German People. That Peace and Protection God will Give Them. 1890. 5.20. Hänschen)이다. 국경을 마주한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는 유사 이래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위세에 눌려왔던 독일은 1870년의 보불전쟁에서 전쟁이 시작된 지 2개월 만에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을 받았고, 1년 뒤에는 적국의 수도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의 독일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 종의 원형인 ‘황제의 종’은 프랑스를 정복한 프로이센의 자부심이 충만한 상태에서 주조하여 쾰른 대성당에 설치되었으나, 불과 수 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프랑스와의 또 다른 전쟁을 위하여 파괴가 된 특별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종은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분포하고 있으나, 각각 문명의 차이와 국민의 생활 방식에 따라 종에 관한 문화도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특정한 종을 둘러싼 전설도 많고, 종소리에는 자연 재해를 이길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는 부족도 많다. 고대부터 종을 예배용으로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신에게 헌정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종의 여운이 영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시아 동부와 남부의 종교의식에는 종이 죄를 정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믿음에서 널리 사용되어왔고 중국인들은 자신의 영혼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위하여 스스로 종을 울렸다고 한다. 여러 민족들은 신과 대화하거나, 또한 신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경우에 신의 높은 권위를 빌리려고 거대한 종들을 제작하였다.
서양의 종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예배 시 신도를 모을 때 종을 울렸다고 하며,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승인한 이후, 이태리의 성당에서는 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도원에서는 종소리가 수도자의 하루 일과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종소리는 아침 예배나 저녁이 도래하였음을 알렸고, 특별한 종교 제례가 있을 때 마다 울렸다. 자연스럽게 종소리는 도시를 지배하게 되었고 어느 지역에 기쁘거나 슬픈 소식, 중요한 뉴스가 있을 때 이를 알리기 위하여 울렸다. 특히 로마 가톨릭교에서는 종이, 천국과 하느님의 목소리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러시아 정교에서는 종을 흔들면 직접 신에게 말을 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로 주술적이나 종교적으로 이용되던 종이 보다 인간의 삶에 깊숙하게 퍼져나간 계기는 14세기 후반부터 시작한, 인간의 창조성을 존중하고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르네상스 운동이었다. 신이나 초자연적인 영혼과의 교통 뿐 만 아니라, 종소리는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의도를 서로 알려주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종은 또한 애국의 상징과 전쟁을 승리한 기념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인 대포를 녹여 종을 주조하여 종탑에 올리거나, 작은 종으로 승리의 기념품을 만들었다. 또한 국가나 마을을 정복한 침략자들은 국민들의 정신을 무력화시키고 생생한 저항의 상징물을 없애기 위하여 마을의 종을 떼어 그들의 나라로 옮기거나, 파괴하여 총칼이나 대포 같은 무기로 만들어버렸다. 1812년 일시적으로 모스크바로 진격하였던 나폴레옹 1세는 러시아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던, 서양에서 가장 큰 종인 모스크바 광장의 ‘짜르(러시아 황제)종’을 러시아 정복의 상징으로 파리로 옮기려 하였으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이동에 실패하였다고 한다. 승리한 나라의 국민들은 종소리가 울릴 때 마다 축배를 들었을 것이고, 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더욱 고취되었다. 그러나 정복당한 나라의 국민은 성당의 종탑에서 제거된 종이 적군의 무기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처절한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라인 강변에 위치한 독일 쾰른 대성당은 그 자체가 보석이라고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성당이자 쾰른 교구의 주교좌로서 독일 카톨릭 정신의 산실이다. 쾰른 대성당은 13세기에 착공되어 19세기인 1880년이 되어서야 완공되었는데, 특히 신성 로마제국 시절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가져온 동방 박사 3인의 유골을 담은 황금함이 안치되어있어 지금도매일 수 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지이자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 유적지이기도 하다. 성당이 완공된 1880년 10월 16일에는 통일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공식 대표로 독일 제국 건국을 공표하며 참석하였고, 성대한 완공 축제가 거행되었다. 개신교신자인 황제에 의하여 로마 가톨릭 쾰른 대성당에서 개신교 신자의 예배가 집행되었으니 그가 국가와 종교의 수장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증명되었다. 당시 쾰른 대주교는 다른 나라에 망명 중이었다고 한다.
쾰른 대성당에는 11개의 큰 종이 종탑에 설치되어 있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22년에 주조된 “성 베드로의 종”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소리를 내는 진자운동 방식의 종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종(24톤)으로 알려져 있다. 대성당에 처음 설치된 종은 1418년에 주조되어 사용되다가 1880년에 다시 주조되어 안치된 무게 3.8톤인 “동방박사의 종 (Dreikönigsglocke)”이고, 1448년에 주조된 두 개의 종인 프레티오사와 스페시오사도 오늘 날 까지 잘 보전되어있다. 성당의 건축 공사가 완공되어가던 19세기에는 건물의 위용에 맞게 더 많은 종이 설치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이에 1870년의 보불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 독일을 건설하여 황제 빌헬름 1세는 프랑스 군에게서 노획한 22문의 대형 청동대포를 1872년 5월 11일부터 이 성당의 외부에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녹여 대형 종을 주조함으로서 강대국 독일 건설의 표상으로 삼고자하였다. 종을 주조하는 장인이었던 안드레아스 함(Andreas Hamm)은 1873년 8월 19일 이 대포들을 녹인 27000kg의 청동으로 종을 주조하였으나, 종소리가 균등하지 못하였기에, 1873년 11월 13일 또 다른 종을 만들었다. 그러나 종의 주조 경비를 부담하기로 한 콜로그네 성당 건립위원회는 프랑스의 대포를 녹여 만든 두 개의 종 모두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인수를 거부하였다. 결국 1874년 10월 3일 에는 또 다시 대포를 녹여 만든 큰 종을 주조하였고, 마침내 1875년 5월 13일에 설치하였다, 이 종은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끈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에게 헌정되었기에 흔히 ”황제의 종(Kaiserglocke)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막강한 독일제국의 상징이자 프랑스에게는 굴욕을 주었던 황제의 종은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이던 1918년 땅으로 내려져 용해되었고, 군수물품의 부족에 허덕이던 독일군의 대포와 포탄으로 만들어져서 프랑스 전선으로 다시 보내졌다. 지금은 위엄을 자랑하던 쾰른 대성당의 황제의 종은 사라지고 1890년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고 대성당의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된 소형 “탁상용 황제의 종”만 남겨져서 옛 독일제국의 영광을 전해주고 있다.
※ 이재태의 종 이야기 이전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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