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자존 높으면 정신적가혹행위에 약해
자신에 엄격한 사람에겐 작은 비난도 치명타 될 수 있어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에게 육체적 가혹행위를 가하는 경우는 최근 거의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몸에 손을 대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이른바 ‘심리적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그간 거의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이후 사회 일각에서는 심리적 가혹 행위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진보연대 장대현 대변인은 23일 “친정권적인 인사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비교하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훨씬 가혹했던 측면이 있다”고
말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성명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이 검찰의 강압적인
수사와 현 정부의 오만과 독선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런 지적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들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
심리적 가혹 행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충분히 하지 않고 일반 피의자 대하듯 했다면 이런 대우를 받는 본인은
큰 고통을 겪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똑 같은 강도로 심리적 압박 수사를 하더라도 조사 대상자의 사회적 위치, 성격에
따라 그 반응은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 자존심이 세고 강직한 사람, 욱하는 성격이 있는 사람 등은 정신적
가혹행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지적이다.
자신에 엄격한 사람에겐 작은 비난도 큰 치명타
한양대 구리병원 박용천 교수는 “일반 범죄자들은 조사 과정에서 폭행, 폭언을
당해도 스스로 잘못한 점이 있기 때문에 대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며
“그러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살아오는 동안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엄격한 자기관리를
해 왔기 때문에 외부의 작은 비난에 대해서도 큰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전 대통령 같은 고위층을 수사할 때 예우를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심리상태를 고려한다는 의미”라며 “수사 과정에서 검찰이 특별히 심리적인 가혹
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노 전 대통령의 평소 성품으로 미뤄볼 때 자신이 평생
쌓아온 이미지에 흠집이 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 재임 때 ‘검찰 조사 중 자살’ 9건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 고위층 또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검찰 수사
중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는 아홉 건이나 발생했다. 당시에도 육체적
가혹행위 논란은 없었으나 정신적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주장은 있었다.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은 노 전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3년 8월4일 대북
불법 송금 혐의와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은 뒤 서울 계동 현대그룹 빌딩 12층에서
투신자살.
△2004년 2월엔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수뢰 혐의로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조사를
받고 부산구치소로 내려간 직후 목을 매 자살.
△2004년 4월에는 박태영 전남 지사가 역시 수뢰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는
중 한강에 투신자살.
△2004년 3월11일 노 전 대통령의 친형 노건평 씨에게 로비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은 “형이 돈을 받았을 리 없다”는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직후 한강에 투신자살.
△2006년 1월21일 현대차 사옥 인허가 로비 사건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은 박석안
서울시 주택국장이 자살했다. 당시 유가족은 검찰이 박 씨에게 폭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 “강압적 수사 없었다”고 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4월30일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뒤 강압적 수사 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일은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유서를 보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의대 서울성모병원 정신과 김대진 교수는 유서에 나타나는 노 전 대통령의
심리 상태에 대해 “수사 과정에서 평생 겪어 보지 못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적응장애를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받은 지 만 24일째가 되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