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자살면역력’도 소용없었다

자살은 전염병…언론이 기름 붓는 꼴

“유명 정치인이나 배움이 많은 지식인이라 해서 일반인보다 더 강한 자살면역력을

갖고 있지 않다.” 홍강의 한국자살예방협회 회장의 말이다.

홍 회장은 “이들은 일반인이 느끼지 못하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변 사람의 도움이 더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기 직전 자신의 컴퓨터에 썼다는 유서를 보면 ‘그

동안 너무 힘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원망하지 마라’란 구절이

나온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함축된 문장이다.

정신과 전문의에 따르면 이처럼 심적으로 힘들 때 주위에서 자살 보도가 홍수를

이루면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살을 도피기제로 삼으려는 속성을 보일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은 힘들 때 어떤 식으로든 도피기제를 선택하는 데 최악이 자살이며 자살에 대한

과잉보도가 사람들의 자살면역력을 무너뜨린다는 설명이다. 최근 탤런트 장자영의

자살이 ‘고발’의 형식으로 변질돼 무분별하게 보도됐으며 동반자살을 비롯한 자살

보도가 홍수를 이룬 것이 사회 구성원 전체의 자살 면역력을 낮췄으며 노 전 대통령도

이런 흐름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또 언론이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을 과잉보도하는 것이 경제위기에 힘든

사람의 자살면역력을 약화시켜 ‘자살 유행병’에 불을 붙일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무분별한 자살보도 홍수사태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시기적으로 지난해 말 탤런트인 안재환에 이은 영화배우

최진실씨 등 유명인의 연쇄 자살사건과 4월 초부터 발생한 일반인의 동반자살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언론의 자살관련 보도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홍 교수는 이에 대해 23일 코메디닷컴과의 전화통화에서 “최근 언론의 자살관련

보도를 보면 자살을 영웅화하고 자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며 “지난해 말 탤런트 안재환의 자살을 보도하면서 연탄화덕이 차 안에서

발견됐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언급하고 게재한 것은 이후의 자살사건에서 보듯 언론이

자살방법을 가르쳐 준 꼴”이라고 강조했다.

홍 교수는 지난해 11월19일 제주도 칼호텔에서 열린 제75회 기자포럼에서도 “언론의

부주의한 보도가 자살을 부추길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날 포럼에서 홍 교수는 2006년 1월~2008년 8월 국내 신문 방송의 자살기사를

모니터링한 결과 신문은 72%, 방송은 80.6%가 부적절하게 자살을 보도했다고 발표했다.

홍 회장은 유명인의 자살보도(홍콩 영화배우 장국영, 국내 영화배우 이은주 최진실)가

일반인의 후속 자살을 14.3배나 높인다고 지적했다.

홍 회장 발표에 따르면 영화배우 이은주씨 자살 후 자살건수는 보도전인 2월 700명에서

보도후인 3월 1300명으로, 같은 자살 방법도 2월 300건에서 3월 750건으로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허울뿐인’ 자살보도지침

세계보건기구(WHO)도 유명 인사의 자살이 일반이 자살에 영향을 끼친다며 자살보도

기준을 제정해 언론의 신중한 보도를 권고했다. 한국은 이에 따라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자살예방협회와 보건복지가족부 공동으로 지난 2004년 자살보도 지침을 제정했다.

이 지침에 따르면 △자살자와 유족의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 △유명인이라도

장소와 방법, 자세한 경위를 묘사하면 안 된다 △불충분한 정보로 자살 동기를 판단해선

안 된다 △속보 및 특종 경쟁의 수단으로 다뤄선 안 된다는 내용이다.

최근 각종 언론매체의 자살보도가 자살 도구나 방법 심지어 구입처를 공개하거나

장례식을 생중계하는 등의 행태는 이 같은 보도지침은 겉치레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독일은 가십거리를 다루는 기자일지라도 장례식장에서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 관례를

지키고 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도록 관련 법률도 있다.

1983년~86년 지하철에서 자살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오스트리아는 자살 기사를

보도하지 않거나 매우 작은 크기의 기사로 처리하는 보도 자제를 통해 지하철 자살

빈도수를 크게 낮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이번 노 전대통령 자살의 경우 언론이 자살방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자살이 다른 원인에 따른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합리화하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어 일반인들의 ‘자살 면역력’을 낮추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생명은

하나 밖에 없으며 어떤 알 권리보다도 우선한다는 데 대한 사회적 인식이 미흡하다는

설명이다.

    이용태 기자

    저작권ⓒ 건강을 위한 정직한 지식. 코메디닷컴 kormedi.com / 무단전재-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댓글 0
    댓글 쓰기

    함께 볼 만한 콘텐츠

    관련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