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사장
달린다. 화창한 봄날, 봄바람 맞으며 봄꽃 향기에 취해 달리고 싶지만, 1분이
아까워 회사 근처 건물 헬스클럽 트레드밀 위에서 그들은 달린다. ‘王’자 몸매,
‘S’자 몸피 때문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내가 쓰러지면 회사가 쓰러지고 가족이
파탄 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달린다. 대한민국 기업의 90%를 차지하는 벤처기업 또는 창업기업, 시쳇말로 구멍가게의
사장들은 달리고 또 달린다. 만인(萬人)의 을(乙), 기뻐도 웃고 슬퍼도 웃어야 하는
그들은 ‘음주운동’ ‘졸음운동’ 사고의 위험 속에서 눈을 비비고 잠을 쫓으며
달린다.
달린다.
A사장은 경제위기에 자신을 돕는 고마운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B사장은 아슬아슬한
손익의 줄타기를 유지하려면 정신이 맑아야 한다고 되뇌며, C사장은 정리해고를 감행하고
수족이 잘리는 아픔을 잊으려 다리가 부서지도록 달린다. D사장은 돈도, 인재도 못
구하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트레드밀의 속도를 높인다. E사장은 실패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임직원을 어떻게 하면 ‘똑’소리 나는 인재로 변화시킬까 고민하며, F사장은
“회사가 어려우니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요구에 위로금과 실직수당 처리를 요구하며
사표를 내는 ‘당당한 신세대 직원’을 이해하기 위해 일그러진 얼굴로 달린다.
정부나 언론이 이미 자리를 잡은 기업의 존망이나 실업문제에 관심이 쏠려 있는
가운데 벤처기업의 사장들은 외롭게 달리고 있다. 초기회사는 창업투자회사들도 외면하는
현실에서 희망과 아이디어의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달리고 있는 것이다. 노래 ‘마이
웨이’가 마라톤과 맞물리는 것처럼 고독한 사람은 고독을 잊기 위해 달리는가. 그래서
창업기업의 사장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헉~헉~헉 달리는 것일까. 그래서 대한민국
헬스클럽 트레드밀 위에는 유난히 사장의 얼굴이 많은 것일까.
지난해 창업한 G사장은 귓전에 울려 퍼지는 “외로울 것 각오하지 않고 창업했느냐”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씩-씩-씩 달린다.
“사장은 무한책임을 져야 하기에 때론 꼰대, 때론 냉혈한이라는 비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장의 고독은 사장들만이 압니다. 특히 창업기업의
사장은 늘 자신을 망망대해(茫茫大海)의 섬같이 느끼며 삽니다. 파고(波高)에 굴복하면
안 되기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달리는 겁니다.”
H사장은 “머리가 밝아야 판단도 밝다”고 되뇌며 간밤 술자리의 유머를 떠올리며
달린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도로에서 한국인 가족 4명을 실은 승용차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나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어서? 아니,
아버지는 기러기아빠, 어머니는 새엄마, 딸은 비행청소년, 아들은 덜 떨어진 놈이어서.
왜 들을 때마다 웃고 난 뒤에 그전에 들었던 기억이 날까? 치매가 왔나? 머리가 녹슬지
않기 위해서는 달려야 해.”
달린다. I사장은 “최고경영자(CEO)가 담배 피우는 회사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투자가의 말을 따라 끊었다가 최근 연이은 밤샘작업을 핑계로 다시 입에 문 담배를
완전히 끊기 위해 달린다. 화창한 봄날 아침, 대한민국 구멍가게의 CEO들은 달리고
달린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가 아니라 지하 헬스클럽에서 이를 악물고. 더러 꿈이
이뤄지는 내일을 떠올리며 배시시 벌어진 입가를 실룩, 실룩이며.
이성주 코메디닷컴 대표
<이 칼럼은 중앙일보 3월 23일자 ‘삶의 향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