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사전의료지시서로 존엄사를…” 움직임
다양한 시각 공존, 사회적 합의 우선돼야
작년 12월 12일 뉴질랜드에서는 79세의 할머니가 자신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소생술을 하지 말아달라는 문신을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자신이 쓰러졌을
때 어떻게 죽을지에 대한 선택을 몸에 새긴 것이다. 문서화 한 것은 아니지만 이
할머니는 임종할 때 자신이 어떻게 죽기를 바라는지에 대해 몸을 종이 삼아 사전의료지시를
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존엄사 관련 1, 2심 판결을 계기로 존엄사 허용 판단 기준과 조건이
문제로 떠오르자 ‘사전의료지시서’를 미리 써두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한 여류인사는 고등학교 동창회 카페에서 변호사인 동기가 소개한 사전의료지시서
예문을 보고 이를 작성, 자녀들과 의사인 사위에게 보여준 뒤 공증을 받을 예정이라고
지인들이 보는 소식지에 글을 올렸다.
그는 자신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자의적인 의사 표시가 불가능해 질 경우를 대비해
사전의료지시를 남긴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기도삽관, 기관지 절개술 및 인공기계
호흡 치료법을 시행하지 말 것 △항암 화학요법을 시행하지 말 것 △인공영양법,
침습적인 치료술을 시행하지 말 것 △탈수와 혈압 유지를 위한 수액요법과 통증관리
및 생리기능 유지를 위한 완화치료는 계속 희망하지만 임종 시 혈압상승제와 심장
소생술은 하지 말 것 등을 사전의료지시서에 기록했다.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의 신상진 의원(한나라당)은 회복 가능성이 없고 기대
여명이 짧은 환자의 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하는 존엄사법 제정안을 지난
5일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률 제정안에서도 환자의 의사가 적혀 있는 사전의료지시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자기 생명에 대한 의사 결정 기록
한국 보건의료연구원 허대석 원장은 “의식을 잃은 채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서
얻게 되는 생명 연장 기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면서
“사전의료지시는 환자가 임종 단계에서의 의학적 조치와 방법에 대해 미리 가족,
의사와 함께 결정 할 수 있도록 하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요즘은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말기 암 환자 등 기대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가
마지막에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도 연명 장치를 사용하면 길게는 수개월의 생명연장이
가능하다.
환자가 명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지 않은 상태라면 이러한 연명치료에 대한
결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경제적, 윤리적 차원에서 의사와 가족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또한 환자 역시 의식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사전의료지시서를 써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변호사와 의사가 나온다.
“실제 진료 현장에서 적용은 무리”란 주장도
법무법인 해울 백경희 의료전문변호사는 “아직까지 사전의료지시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문의를 받아본 적이 없다”며 “3차 의료기관 정도의 큰 병원에서는
일부 이런 동의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병원에서 의학적 결정에 환자의
의지는 거의 반영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사전의료지시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진료현장에서도 아직까지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의료원 윤수진 박사팀은 2008년 대한신장학회지에 ‘말기신부전 환자에서
사전의사결정서의 적용’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연구진은 2007년 1월부터 6월까지 혈액투석을 받는 환자 35명에게
자신의 삶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치료에 대해 의사와 면담을 통해 설명을 듣고 난
후 18개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그러나 18개
모든 항목에 대해 동의한 6명 중 3명이 사망했고 이들은 모두 자신이 거부한 심폐소생술
등을 받다가 사망했다.
또한 국립암센터 윤영호 박사팀이 2009년 1월 국제학술지 ‘완화의학(Palliative
Medicine)'에 게재한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3명 중 2명이 환자가 자기 생명
결정권을 가지는 것에 찬성했다.
윤 박사팀이 2004년 한국 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지에 게재한 품위있는 죽음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태도에 관한 논문을 보면 실제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한 환자의
사전의사결정에 찬성하는 비율은 이와 비슷한 71~81%였지만 사전의료지시에 실제
서명한 환자는 단 1명뿐이었다. 아직까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간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독일에선 법규 없으나 의사협회가 기준 마련해 권장
사전의료지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돼 온 독일에서도 아직 사전의료지시에
대한 법규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독일 연방의사협회가 증빙 근거를 위해 사전의료지시는
문서로 작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가능한 구체적인 치료 상황에 대한 언급을 권장할
뿐 여전히 치료에 대한 동의와 거부 등에 대한 특별한 형식이 없는 상태다.
일본 역시 아직까지 법규로 제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법원의 판례 등을 참고하는
수준이다. 이는 사전의료지시의 범위, 형식, 내용, 구속력 등의 요소에 대해 여러
관련 위원회와 기관에서 바라보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톨릭대의대 인문사회과학교실 구인회 교수는 “존엄사를 인정하는 환자 범위를
지정하는 문제부터 기대 여명까지 의료진에 따라 의견이 다양할 수도 있다”면서
“구체적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허대석 원장은 “아직 환자 본인에 대해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잘
알려주지 않는 한국적 상황에서 환자 본인이 의학적 결정에 참여하는 문화가 정착되기는
어렵다”면서 “사전의료지시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소한 이 정도 선까지는 타당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