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면제 되니 ‘미국산 한국인’ 급증?
임신 8개월 이상은 원정출산 위험
미국 비자면제 프로그램(VWP)에 한국이 지난 17일부터 대상국으로 가입함에 따라
이제 누구나 미국 비자 없이도 미국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미국에서 아기를
낳아 ‘미국인’을 만들겠다는 원정 출산 행렬도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 미국 헌법에 의해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에게는 모두 시민권이 주어진다.
한국인 부모에게 태어나야 한국인이 되는 한국의 ‘속인주의’(부모 국적이 아기의
국적)와는 달리 미국은 헌법으로 ‘속지주의’(태어난 땅이 국적의 기준)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한국의 비자면제 프로그램 가입에 따라 미국이 속지주의를 철폐하리란 예상이
나돌기도 했지만, 주한 미국 대사관은 “종전과 달라지는 바는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미국 LA에서 한국 산모의 원정출산을 안내하는 한 조리원은 “비자 면제로 원정출산
문의가 크게 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원정출산에 대한 문의 전화는 꾸준히 증가세”라며
“현재 추세로 봐서는 내년 3~4월을 목표로 하는 산모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 의료 전문가들은 장시간 항공 여행을 해야 하는 원정출산은 산모와
아기에게 모두 “독이 될 수 있다”며 특히 건강 문제를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산모와 아기의 건강이 가장 먼저 고려돼야
2004년 원정출산에 올랐던 30대 주부의 유산 소식은 ‘일단 가고 보자’는 무분별한
원정출산 바람에 경종을 울렸다. 이 임신부는 장시간 비행기 여행으로 아기를 감싸는
태반이 분만 전에 분리되는 태반 조기박리 현상으로 유산했다.
현재 국제선 탑승은 임신 8개월 미만의 임신부에게만 허용된다. 임신 8개월 이상이면
항공여행을 해도 문제가 없다는 의사의 진단서가 필요하다.
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김영주 교수는 “미국 비자면제가 원정출산 증가의 도화선이
될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부추기는 원인으로 작용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김 교수는 “미국 현지의 체재비를 줄이기 위해 출산일이 임박해서야 비행기를
타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위험성은 더욱 높아진다”며 “유산 경험이 있는 임산부,
임신중독증, 당뇨병, 고혈압, 자궁근종 등이 있는 임산부, 나이 많은 임산부는 임신
8개월 미만이라 해도 장거리 비행 자체가 극히 위험한 행위에 속한다”고 경고했다.
갑작스런 주위 환경의 변화는 임신부와 태아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초래한다. 김
교수는 “불안 상태가 지속되면 저체중아나 조산아를 낳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출산
뒤 우울증에 시달릴 우려도 있다”고 설명했다.
순천향대병원 산부인과 이임순 교수는 “산모가 비행 중 갑작스레 진통이나 출혈을
보이면 전문의 치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무분별한 미국 행보다는 산모와 아기의
건강에 먼저 신경을 쓸 것을 당부했다.
이 교수는 “비행기 안의 기압 차이는 태아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좁은 자리에 장시간 웅크리고 있어 생기는 여러 증상) 때문에 산모의 혈액에
피떡(혈전)이 생기는 등의 문제가 초래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낳기만 하면 미국사람 되나
문제 없이 출산한 뒤도 문제다. 전문가들은 출산 뒤 1~2개월 정도 휴식을 취한
뒤 귀국하도록 조언한다. 출산으로 허약해진 산모, 면역력이 약한 신생아 모두에게
장거리 비행은 또 다른 ‘독’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이임순 교수는 “원정출산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떠나 산모와 아기의 건강이 가장
먼저 고려되는 출산문화가 시급하다”며 “꼭 원정출산을 가야겠다는 임신부는 미리
전문의에게 충분한 진료와 상담을 받는 게 불의의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과거 원정출산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 비자면제에 따라 누구든 원정출산에
나설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야말로 ‘오해 중의 오해’라는 비판도 있다.
LA 사업가 임 모씨(48세)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 ‘자격’을 갖추는 것과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자라는 것은 사실 아무 상관도 없다”며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려면 누군가 미국에 사는 보호자가 있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학비가 사립대학보다
비싸다는 기숙사형 사립 초-중-고교에 넣어야 되는데 부유층이 아닌 사람이 그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며 비자면제가 마치 원정출산을
대중화시키는 계기라도 되는 듯 생각하는 분위기를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