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수난시대'

평론가 혹평-대중인기 양립해야

1970~80년대 분위기에 푹 빠졌습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S의대

교수들과 찾은 서울 강남의 한 카페. 어림 셈을 할 수 없을 정도의 LP가 벽을 꽉

채우고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교복 시절의 향수가 스며든 대중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중고교 때 케이시 케이즘이나 울프맨 잭과 같은 세계적인 DJ가 꿈이었을

정도로 팝 음악을 좋아해서인지, 매주 빌보드와 캐시박스 싱글 및 앨범 차트 200위까지가

뇌 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당시 저를 비롯해 몇몇의 ‘광’들은 용돈이 생기면 ‘백판’을

파는 앨범 가게로 몰려갔고, 팝 음악의 담론을 나눴습니다.

적어도 그때

그랬습니다. 우리 ‘전문가’ 그룹과 일반 학생이 좋아하는 대중음악이 달랐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아바와 보니M, 레이프 가렛, 둘리스, 스모키 등에 열광할 때 우리는

레드 제플린, 레너드 코헨, 제니스 조플린의 음악에 빠졌습니다. 에릭 클랩톤의 음악

중에서도 일반 학생이 ‘Wonderful Tonight’을 좋아했다면, ‘전문가’들은 ‘Layla’와

‘Let It Grow’를 즐겨 들었습니다.

당시 급우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과

달리 ‘광’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음악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음악과 대중적인 음악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최근 중앙대

진중권 교수의 ‘디 워 혹평’에 대한 대중의 공격을 보면서 80년대가 마치 먼지

쌓인 책처럼 떠올랐습니다.

저는 ‘평론가들의 혹평’과 ‘대중의 인기’가

양립 가능하다고 봅니다. 전문가들이 보는 관점과 대중의 관점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평론가가 대중의 기호에 아부를 하기 시작하면 이미 평론가가 아닙니다. 거꾸로 대중이

평론가에게 대중의 시각을 요구하면 그것은 ‘다수의 폭력’일 따름입니다.

울가망하게도

다수의 폭력이 전문가를 위협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세계적 미식가의 전문적 음식

평에 대해 식당주인과 가족,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네가 뭘 알아”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여론 형성 기능은 전문가의 손에서 대중의 손으로 떠났습니다.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일부 전문가의 담합이 ‘사이비 여론’을 형성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중의 여론 형성이 자체 내에서 합리적이지

못하면 ‘폭력적 양상’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최근 역사는 대중의 합리적

여론형성보다 집단 히스테리적인 여론 형성이 지배적이 돼 버렸습니다. 의료인에

대한 대중의 맹목적 비난도 이 테두리 안에서 풀이되겠지요?

전문가들의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세상 모든 영역이

열렸는데 의료인만 문을 닫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대중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중의 맹목성을 부추기는 집단과는 맞설 수는 있을 것입니다. 대중의 합리성을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그 길이 분명 있지만, 그 길은 안개 속에 있는 듯 합니다.

70년대

록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통음(痛飮)을 했습니다. 그 시절이 그리워서, 그 시절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닙니다. 세상은 열리고 있는데, 오히려 세상은 닫히는 패러독스가

가슴을 찔렀습니다.

폐쇄적인 강압의 논리는 사라졌는데 그 자리에 들어설

합리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설 자리는 어디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누구와

싸워야 하나, 구름 속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길을 가면 갈수록 목적지는

더욱 멀어져 보입니다. 그래도 역사는 흐르겠지요?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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