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사유가 번지면 갈등이 줄어들 텐데
[이성주의 건강편지]파이프의 배반
철학적 사유가 번지면 갈등이 줄어들 텐데
그림 한 편을 감상하시지요. 1999년 선보인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나요? 아니면 2009년 개봉한 우리나라 영화 ‘전우치’는? 1898년 오늘(11월 21일) 태어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1953년 발표한 ‘겨울비(Golconde)’입니다.
이 그림은 겨울비 방울을 사람으로 바꿔놓았는데, 유심히 보세요. 중절모에 코트를 쓴 신사의 모습이 조금씩 다 다르지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은 모습도 있고 가방을 든 모습도 있습니다. 각도도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비평가는 인간의 획일적 모습을 그렸다고 해설하는데, 각각 다른 사람들이 획일적으로 사는 것을 비판적 시각에서 그린 것일까요?
마그리트는 유명 화가가 으레 그렇듯 독특한 사람이었지요. 집안의 주방을 화실로 개조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침실에서 몇 발자국 거리의 작업실로 갈 때에도 그림처럼 중절모와 정장을 입었다고 합니다.
마그리트의 위 그림 역시 유명한 작품입니다. 제목은 ‘파이프의 배반’입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썼지요. 실재와 의미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나 할까요?
실재와 의미의 불일치는 예부터 철학의 고전적 주제였습니다. 철학자들은 왜 사람들은 물체와 세계를 다르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했지요. 플라톤은 현실의 세계가 ‘진짜 세계(Idea)’와 다른 가짜 세계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반해 ‘진짜 세계’의 복잡한 속성 때문이라고 풀이했지요.
시인 김춘수가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읊은 것도 결국 실재와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지요.
생각이 얕은 사람은 자기가 본 것을 다른 사람이 똑같이 본다고, 자신이 본 것이 진리라고 단정 짓고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합니다. 인습이나 상식, 유행에 쉬 휩쓸립니다. 쉬 분노하고 쉬 절망합니다. 그러나 철학적인 사람은 함부로 결론 내지도, 함부로 남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 갈등의 해결책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실체에 대한 인식이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을, 다른 시각이 틀린 시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세상이 참 부드러워질 것인데, 넓어지고 깊어질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르네 마그리트가 태어난 지 113년 되는 해에 그의 기발한 작품을 감상하며….
미술가의 명언들
<제 625호 건강편지 ‘메듀사의 뗏목’ 참조>
오늘의 음악
오늘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과 같은 제목의 노래 ‘겨울비’를 먼저 준비했습니다. 로커 김종서가 노래합니다. 이어서 차이코프스키의 ‘위대한 예술가를 위하여’를 리히터, 코간, 구트만이 함께 들려줍니다. 마지막 노래는 마그리트의 고독을 생각하며 조르주 무스타키의 ‘Ma Solitude(나의 고독)’을 마련했습니다.
♫ 겨울비 [김종서] [듣기]
♫ 위대한 예술가를 위하여 [리히터, 코간 & 구트만] [듣기]
♫ Ma Solitude [조르주 무스타키]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