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슬퍼할 때 울지 않으면 매맞아야 하나?
[이성주의 건강편지]
지난주에는 매주 월요일 보내는 건강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전날 일어난 무안 제주항공 참사에 대해 글을 쓰려니 가슴이 더 아팠고, 슬픔을 접고 다른 글을 쓸 수도 없어서였습니다.
언론인으로서 부끄럽지만, 가급적 참사 뉴스를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좀 더 젊었을 때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여겼지만, 나이가 들면서 여성호르몬 비율이 늘어나서인지, 슬픔과 아픔을 객관화하는 힘이 약해지는군요. TV 프로그램도 가슴에 편하지 않은 것은 피하게 되고···.
그러나 슬픔에 대해서 계속 감도는 물음이 무안 참사에 대해서 지나치지 못하게 하네요. 나라에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모두가 똑같이 슬퍼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이 질문에 불편한 사람이 적지 않고, 따라서 저와 저희 회사가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지만, 던지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날 이후 각종 연말 행사가 취소됐고 새해를 맞아 여러 행사도 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리마다 정당과 지자체 등이 내건 현수막들이 잠시 잊었던 슬픔도 강제로 깨우는 듯합니다.
슬픔에 대한 감수성은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슬픈 일을 객관화하면서 추모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참사를 떠올리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외면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족의 아픔에 공감하지만, 모두 슬픔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데에는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슬프면 울면서 감정을 정화하지만, 어떤 사람은 일부러 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이겨내기도 합니다.
한두 사람이 참사를 당하면 그러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이 비극적 일을 당하면 모두 숨죽여 슬퍼해야 하는 문화가 절대적인지도 의문입니다. 사고 당일 한강에서 불꽃놀이를 했다고 해서 6개월 영업정지를 당한 업체 이야기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문화 어린이와 사회봉사단체 회원 등의 초청행사와 방한 외국인을 위한 행사가 열려서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어려웠다는데···. 그날 행사가 취소됐다면 어떤 어린이에겐 평생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할 수 없는 건가요. 서울시가 업체의 수익금을 보전해주지도 않을 것인데 가뜩이나 얼어붙은 경기에 엄벌이 옳은 것인지 정말···.
물론, 상갓집 옆에서 잔치 벌이는 것은 손가락질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스포츠 경기를 아예 안 하는 것보다 경기 전 묵념을 하거나 EPL의 황희찬처럼 골을 넣고 세리머니 대신 묵도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나요?
마침 1941년 오늘,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두 교서에서 네 가지 자유를 제시했습니다.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이지요. 뇌과학에 따르면 이성의 바탕에는 감정과 정서가 있는데 자신의 감정에 대해 강요받지 않는 자유는 이 모든 자유의 바탕에 있지 않나요?
슬픔이나 분노 같은 집단정서를 모두 똑같이 공유해야 한다는 의식이 ‘전체주의적 사고’라면 너무 나간 생각일까요? 모두 슬퍼할 때 일부러라도 웃으면 안 되나요. 그런 사람을 찾아내 벌주는 것이 건전한 사회일까요?
1996년 1월 6일은 가수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제 신문사 동기가 “김광석이란 가수 만났는데 노래도 잘 부르지만, 사람도 참 괜찮더라”고 하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네요.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준비했습니다. 유투브 ‘Thekeishin79’ 페이지에 올라온 공연 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