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오페라, 아이스하키 선구자가 의사?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42)의료계의 선각자들
1991년 1월 힘들게 닻을 올린 재단법인 한국의학원은 재정 지원이 필요한 기초의학, 의학교육 등을 후원하고 국내외 학술대회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며 한국 의학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한국의학원의 업적 가운데 일반인은 물론, 의료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의학사에서 이정표로 남을 만한 것이 대한민국 의료계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들의 업적을 책으로 펴낸 것이었다.
의학원은 전문 도서 발간을 위해 ‘집필위원회’를 조직했는데 필자는 첫 작업으로 의료계 선구자들이 기여한 발자취를 더듬어 남길 것을 제안했다. 필자는 의학·의료 분야의 여러 사업을 기획해 진행하면서 적지 않은 의사들이 의료 영역 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활동해 온 것을 피부로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선구자 출판위원회’에선 의사로서 진료 외에 항일운동, 외교, 국방, 음악, 체육 등 사회 영역에서 선구자 역할을 한 인물을 고르며 외국인 선교사로서 우리나라에 공헌한 의사도 포함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주요 의대에서 골고루 11명으로 편찬위원회를 구성했고, 대학과 학회에 널리 알려 선구자 추천을 받았다. 2007년 발간된 제1집은 광복 이전 의사, 2009년 나온 제2집은 광복 후 1950년까지 의대 졸업생, 2011년의 제3집은 1951년 이후에 졸업하여 1970년까지 의사가 돼 활동한 의사를 포함했다. 한국의학원이 강원 양양군 남대천의 38선 표석 자리에 설립한 의학문화원 내 ‘의료인의 전당’에는 이들 선구자의 활동이 전시돼 있다.
■호러스 알렌(1858~1932)=의사, 선교사이자 외교관. 갑신정변(1884년) 때 칼에 찔린 금위대장 민영익을 완치해 고종에게 제안, 이듬해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토록 했으니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을 전수한 의사다. 그는 제중원 의학부에서 의학과 위생학(공중보건학)을 가르쳤고, 학문이 이어지도록 토대를 닦았다. 여러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활약할 길을 연 주인공인 셈이다.
■로제타 홀(1865~1951)=여의사 양성의 선구자였다. 1890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서울 정동 이화학당 내 부인병원(보구녀관) 책임자로 일했고, 보구녀관 동대문치료소 원장으로도 활약했다. 1928년 여자의사를 양성하는 조선의학강습소를 설립해 10년 운영했다. 여의사 양성이 안정화되자 한국인에게 인계했고 이 학교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수도의대, 우석대 의대를 거쳐 지금의 고려대 의대로 발전했다.
■김창세(1893~1934)=1916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 홍십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포들의 진료 뿐 아니라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미국 존스홉킨스보건대학원에서 우리나라 의사 최초로 미국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국내 처음으로 세브란스의전에 위생학교실(예방의학교실)을 창설해 주임교수로 근무하면서 국민을 위한 건강강좌, 특강, 잡지 기고 등을 하면서 외교활동과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도산 안창호의 주치의로도 유명하다.
■윤치왕(1895~1982)=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주선으로 영국에 가서 1925년에글래스고 의대를 졸업하고 산부인과에서 수련받았다.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근무하다 김천에 있는 구세군병원에서 일했다. 광복 후 1949년에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중령으로 근무하다 의무감, 육군군의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고 소장으로 전역했다. 군진의학의 토대를 닦은 선구자이다.
■양유찬(1897~1975)=부산에서 태어났고 다섯 살에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갔다. 1923년 보스턴대 의대를 졸업하고 하와이로 돌아와 외과·산부인과 의원을 열었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에도 기여했고, 이승만이 주도했던 하와이동지회 이사로도 활약했다. 1951년에 주미한국대사로 임명받아 9년을 활약했고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 특명전권순환대사 등을 역임했다. 사재를 털어가면서 뜻깊은 외교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공병우(1907~1995)=1920년 의사검정시험에 합격했고 일본 나고야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 서린동에서 한국인 최초로 안과의원을 개원하여 42년을 진료했다. 한글학자 이극로의 영향을 받아 한글 보급에 힘썼다. 언더우드 타자기회사에 의뢰하여 1949년에 한글타자기 시제품 3대를 제작했다. 1968년에는 한영겸용 타자기를 개발했다. 맹인부흥원을 설립하여 맹인 재활사업을 돕기도 하였고, 한글학회 부설 한국기계화연구소 발족과 아울러 한글기계화지라는 잡지도 발간했다.
■이인선(1906~1960)=193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 이탈리아로 가서 이비인후과 수련을 하며 성악을 공부했다. 1937년 서울에서 이비인후과 의원을 개원하면서 성악연구소를 설립, 저녁에는 성악교수로 활동하였다. 우리나라 오페라의 선구자로서 본인도 공연에 꾸준히 참여했고, 후진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
■유한철(1917~1980)=1938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에 음악과 연극, 아이스하키를 즐겼으며 의사가 되고 나서도 병원 진료보다는 스포츠계, 연극·영화계, 음악계, 평론계 등에서 팔방미인으로 활약했다. 한국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과 대한체육회 아이스하키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이름을 딴 ‘유한철배 아이스하키 대회’는 빙상계의 가장 권위있는 대회이다.
■정진우(1928~)=한국 클래식 계의 영원한 스승으로 불린다. 1945년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월남,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건반악기를 배웠고 의대 재학 중에 음악가들과 교류했다. 졸업 후 내과 수련을 받다가 군의관으로 자원입대하였는데, 발에 동상을 입고 1951년에 대위로 명예제대 특명을 받았다. 부산 피난처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으며, 1957년에 오스트리아에 가서 유학을 하고 2년 뒤 귀국, 서울대 음대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