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 신약, 우리는 왜 못써요?...의사·환자 모두 '한숨'

신약 보장성 강화vs건보재정 고갈...학계 "제도 개선 필요한 시점"

급성 및 만성 골수성 백혈병, 다발성 골수종, 림프종 등 혈액암은 과거에는 치료가 쉽지 않았으나, 최근 치료 효과를 높인 신약의 진입으로 환자의 생존율이 크게 개선됐다. 다만, 약값이 비싼 탓에 건강보험 보장(급여화) 속도가 더디다는 점이 문제로 떠올랐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백혈병과 다발성 골수종 등 혈액암을 치료하는 신약들이 잇달아 개발되고 있으나, 국내 환자들이 혜택을 누리기엔 '그림의 떡'이라는 지적이 쏟아진다. 의학계와 환자단체는 국내 건강보험 보장성(급여화)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2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이주영 의원(개혁신당)은 '국내 혈액질환 치료환경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를 맡은 윤덕현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와 이은영 한국백혈병환우회 대표는 혈액암 치료제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국내 의료 현실에 쓴소리를 냈다.

혈액암엔 급성 및 만성 골수성 백혈병, 다발성 골수종, 림프종 등이 있다. 특정 장기나 조직에 종양 덩어리(고형암)가 만들어지는 다른 암종과 달리, 이들 혈액암은 혈액과 림프액 등을 통해 암세포가 전신을 떠나닌다. 때문에 고형암에 비해 치료가 쉽지 않고, 환자의 생존율도 크게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표적항암제인 '이매티닙(제품명 글리벡)'의 개발 직후 백혈병을 중심으로 한 혈액암의 치료 성공률도 크게 개선됐다. 최근엔 CAR-T(카티) 세포 치료제(제품명 킴리아 등)와 같은 면역세포 치료제까지 등장하며 혈액암 치료에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

국내외 제약사들 역시 관련 연구·개발(R&D)에 집중하면서 2028년까지 신약 출시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들 신약의 약값이 워낙 비싸다보니 국내 건강보험 재정 고갈을 이유로 보험 적용 속도가 더디다는 점이다. 의료진의 경우 높은 치료 효과가 예상됨에도 환자에 처방을 주저하고 있으며, 환자 역시 비급여(전액 본인 부담) 금액을 걱정해 사용을 꺼리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최초의 CAR-T 세포 치료제인 '킴리아(성분명 티사젠렉류셀)'는 1회 투여에 3억6000만원이 든다. 급여처방을 받으면 환자부담금은 600만원 수준으로 줄어들지만, 적용 조건이 까다롭다. 백혈병 표적항암제 역시 최근 4세대(애시니밉)까지 개발됐으나, 비급여 항목이라 1회 치료 시마다 환자는 수백에서 수천만원을 부담해야 한다.

이은영 대표는 "(신약의) 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건 결국 최종적으론 환자에 피해로 돌아간다"며 "혈액암 치료제가 많이 나온다는 건 환자들에게 행복한 일이지만, 건강보험 보장 실패로 인해 신약이 '그림의 떡', '고민', '한숨'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기에 신약 허가와 급여 결정 과정에도 '환자 중심 의사결정', '환자 참여'가 필요하다"며 "임상 효과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것처럼 투약하는 당사자로서 환자의 말도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 현실에 맞는 환자의 의사결정 참여 방안을 논의할 시점이 됐다"고 덧붙였다.

윤덕현 교수는 "다발성 골수종을 예로 들자면, 과거에는 불과 2~3년 만에 환자가 사망하는 질환이었다"며 "치료제 개발 후 미국과 독일 등에선 점점 생존 기간이 늘어나고 있지만, 국내에선 생존 기간 격차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의사들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절대 아니다"라며 "환자들에게 적절한 치료제를 제공하지 못하는 환경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심지어 일부 치료제는 국내 도입을 패싱한 사례도 있다"며 "환자의 생존기간 등을 위주로 한 기존 평가 방식에서 벗어나 전문가의 의견 비중을 높여 신약의 신속한 급여 전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개최된 '국내 혈액질환 치료환경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모습. 왼쪽부터 윤덕현 서울아산병원 교수, 이은영 한국백혈병환우회 대표, 김석진 대한혈액학회 이사장, 최인희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 전무, 박희연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 사무관, 강미영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기준부장,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 사진=최지현 기자

이날 토론회에선 이들 약제의 건강보험 보장(급여화) 여부를 권고하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중증(암)질환심의위원회(암질심)의 제도 개선 방안이 집중 논의됐다. 학계와 환자단체의 의견은 대체로 일치했다. 전문가와 환자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심사 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암질심을 고형암과 혈액암으로 분리해 심사하는 방안이 다시 제안됐다. 백혈병환우회는 2017년부터, 대한혈액학회와 대한조혈모세포이식학회는 2023년부터 정부에 요청한 상태다.

더불어 윤덕현 교수는 대만이나 일본 등에서 활용 중인 '시범 급여' 방안도 추가로 제안했다. 정부가 신약 사용을 허가하면 바로 급여화하는 '선급여 후평가' 방식이다. 중증·희귀질환 치료제를 중심으로 초기 도입 관문을 넓히는 대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신약의 활용도나 치료 효과를 지속적으로 평가해 재정 낭비를 막는 방법이다.

김석진 대한혈액학회 이사장은 "신약 접근성 문제는 곧 비용의 문제인데, 당사자인 환자나 가족의 입장에선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한다는 일'은 너무나 견딜 수 없는 문제"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과거엔 약이 없어 치료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약이 개발돼 치료할 수 있음에도 환자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경제적 이유라면 규정이 개선돼야 맞다"고 현행 의료제도의 변화를 촉구했다.

토론회를 주최한 이주영 의원 역시 이날 논의에 공감하며 "우리 건강보험제도가 '적당한 의료를 더 보편적으로 제공할 것인지', '수혜 환자가 적더라도 고난도의 중증·희귀치료 부담을 줄일 것인지'의 사이에서 고민이 필요해진 상황"이라고 의견을 냈다.

이 의원은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신약 관련 보험급여 체계에 대한 개선 논의"라며 "급여 심사 기준을 재정비해 환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의료진에게도 폭넓은 선택권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오늘 토론회가 그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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