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증원 타당한 숫자?... "복지부 약속대로라면 최대 500명 적정"
[단독인터뷰]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전문의
대통령실이 최근 의대증원과 관련해 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0명 유지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태도다. 다만 대통령은 의료계에 '타당한 숫자'를 들고 와달라고 주문했다. 그렇다면 과연 타당한 숫자는 몇 명일까?
최근 느리고 건강하게 나이드는 이른바 '저속노화' 개념으로 대중에게도 친숙한 서울아산병원의 노년내과 전문의 정희원 교수는 코메디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우선 연 250~500명 규모의 의대증원을 제안했다.
밑 빠진 독에 밑 채우겠다는 복지부...약속 지킨다면 필요한 건 최대 연500명
정 교수는 "최대 500명 증원 추산은 보건복지부의 필수의료정책 패키지에 기반한 것이다.복지부가 이미 제시한 4대 개혁과제 중 인력확충을 제외한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공정 보상 등 3대 개혁 과제를 정부가 충실히 이행한다고 가정할 때 10년 뒤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의사수는 최대 2500여명 규모까지 떨어진다. 결국 향후 5년동안 연 250~500명 규모 증원도 충분하다는 추산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단적으로 홍윤철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의 추계를 예로 들었다. 홍 교수 연구팀이 2020년 발표한 '미래사회 준비를 위한 의사인력 적정성 연구'는 정부가 의대증원 근거로 제시한 3개 보고서 중 하나다.
지난달 12일 국회입법조사처 의대정원해결 간담회에서 홍 교수는 2035년 부족한 의사수는 7264명(의사 은퇴연령 80세 기준)라고 추산했다. 다만 의료개혁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건강 전반을 담당하는 일차의료 의사, 즉 주치의 제도가 적절히 도입될 경우 부족한 의사수는 2637명~3337명으로 쪼그라든다. 마침 복지부는 이미 필수의료패키지를 통해 주치의제도와 흡사한 '지역완결형 의료'를 약속했다.
다시말해 정부가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를 위한 재원이 제대로 분배될 수 있도록 '밑 빠진 독' 수리만 잘 해준다면 의대증원을 연 500명 규모로 산정해도 충분하단 말이다. 정 교수는 "정부가 2000명을 계속 주장한다는 것은 필수의료패키지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할 생각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런 자기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증원규모를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비용절감 계획을 짜내면서 계획대로 하면 필요한 예산이 500만원이지만, 어차피 이 계획 못지킬 것 같으니 미리 2000만원을 달라는 말과 같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필수의료패키지는 모두 실행에 옮기고 의대정원은 기존대로 2000명 증원이 이뤄질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정 교수는 물이 넘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2040년에 접어들면서 절대적 인구의 감소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위와 같은 가정은 모두 복지부가 이미 발표한 대로 필수의료, 지역의료 강화를 위한 여러 정책을 지원했을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 정 교수는 "필수의료를 하는 이들은 계속 손해를 보고, 지역의료 체계 손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재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질 경우 2000명이 아닌 그 이상의 의사를 늘린다고 해도 현재 발생하고 있는 필수의료 인력 부족 등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라고 덧붙였다.
노인은 급증, 인구는 급감... "탄력적 대응할 수 있어야"
정 교수는 노년내과 전문의다. 노년내과는 말그대로 노인환자의 복합적 건강 및 질환 문제를 관리하는 곳이다. 때문에 그는 빠르게 나이드는 대한민국의 인구 구조와 의료 수요에 대해 일찌감치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온 의사이기도 하다.
정 교수는 "국민영양데이터를 분석해온 결과 지난 15년간 어르신들은 꾸준히 건강해져 왔다. 건강하게 늙어가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약도 변했고, 의료기술도 달라졌다. 아마 2024년의 노인과 2034년 노인 개개인의 평균 건강상태, 의료기술은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건강상태가 너무 좋아져서 지금 노인들보다 병원을 찾아야 하는 빈도가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말이다. 의료수요를 예측하기 위해서 단순히 인구변화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변수를 추산해서 넣고 계산을 돌려야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가 당장 연 500명 의대증원을 제안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결코 고정된 숫자는 아니라고 힘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노인 인구가 빠르게 늘면서 향후 20년간 의료 수요가 무자비하게 늘 수 있다. 다만 2050년에 접어들면서 절대 인구 감소와 함께 의료 수요가 빠르게 줄어든다. 20년 전과 현재의 의료환경이 전혀 다르듯 의료기기나 약물 개발 혹은 의료전달체계 개선으로 노인들의 의료이용 행태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처럼 의료 수요에는 여러 변수가 영향을 미친다. 한정된 의료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런 변수들을 잘 반영해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내야 한다. 의료 공급 정책 결정에 미세한 조정 능력이 필요한 이유다. 지금처럼 인구 대비 의사 숫자 식으로 기계적 증원은 의사가 남아도는 시대를 만들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65살이상 노인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15.7%에서 2050년 40.1%로 급증한다. 다만 2050년 이후부터는 증가폭이 다소 둔화한다.
정 교수는 일본의 전례를 살펴볼만 하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대략 2006년의 일본 정도가 될 것같다. 사실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문제를 겪었기에 의사증원을 비롯해 지역의사제, 방문진료 등 여러가지 시도를 하면서 조정을 하고 있다. 일본도 의사를 늘렸다가 최근에는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1시간 넘는 인터뷰 내내 정 교수는 사실 의대증원 논란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한 한국 의료시스템 구축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노인이 많아지는 나라에서 현명한 의료자원 분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처럼 무한경쟁식 의료비 증가 추세로 가다보면 건강보험재정 고갈과 현재 의료시스템 붕괴는 막기 힘들다"고 내다봤다. 결국 이대로 가다보면 부유층 등 일부는 미국식 의료민영화 모델의 의료를 소비하는 한편, 서민 등 일반 국민은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영국식 공공의료에만 접근할 수 있는 양극화된 시스템이 자리잡을 수도 있다고 정 교수는 전망했다.
정 교수는 "한국식 의료시스템에서 지속가능한 의료를 지속하기 위해 선제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국민들이 건강하게 늙어갈 수 있도록 교육 등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미래의 의료비를 아낄 수 있게 된다. 건강한 인생을 마칠 수 있도록하는 데 투자해야 건강보험을 떠받치는 재정이 덜 빨리 고갈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