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수면음악, 검증 안돼"...잠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윤한씨 "마구 올라오는 음악들에 지쳐...데이터 기반으로 연구"
우리나라는 수면 빈곤국 중 하나다. 연령대를 불문하고 잠을 자는 시간이 비교적 짧다. 수면장애 문제를 겪는 이들도 많다. 국내 수면장애로 진료받은 환자 수는 2017년 약 84만명에서 2021년 약 110만명으로 5년새 30%나 늘었다. 진료비도 2배나 증가했다.
잠 못이루는 밤이 늘어나는 데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과도한 스트레스이며, 이 밖에도 △고령의 나이 △우울·불안 장애 △알코올, 카페인 과다 섭취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수면장애가 이어지면 정신적, 신체적 질환에 취약해지기 쉽다. 이때 장기간 계속된다면 △고혈압 △심근경색 △뇌졸중 △기억력 저하 등 고위험 질환이 생길 수 있다.
피로감이 축적된 탓일까? 유튜브에서도 '수면(유도) 음악'이 인기다. 조회수가 1억회를 웃도는 것도 있을 정도다. 이런 트렌드를 반영하듯 지난달 서울 마포문화재단이 '도심형 휴(休)<음악치유 M>' 행사에서는 '사운드 슬립(SOUND SLEEP)'이라는 수면 음악 콘서트가 열기도 했다. 콘서트를 이끈 사람은 바로 피아니스트 윤한(40)씨. 윤씨는 음악가로는 드물게 수면음악 연구에 나섰으며, 이를 바탕으로 실제 작곡까지 하며 앨범을 냈다.
팝 재즈를 작곡하던 윤씨는 미국 버클리 음대에 이어 상명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7년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그를 수면음악의 세계로 이끈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불면증이었다. 유산 후 스트레스 탓에 아내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피아노곡을 연주했으며, 놀랍게도 아내는 스스르 잠이 들었다.
이후 윤씨는 수면에 대한 국내외 논문 100여편을 모아 공부하는 등 수면 음악을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지난달 수면콘서트를 직접 찾아 그에게서 잠과 음악의 연결고리에 대해 들어보았다.
수면음악은 친근하지만, 낯설기도 한데요. 좀더 설명해주신다면?
(수면음악은) 말 그대로 수면에 도움되는 음악이죠(웃음). 잠을 자는 활동은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활동이잖아요. 잠을 잘 자야 다음날 컨디션도 좋고 스트레스도 풀리고요. 그런데 잠을 자기 위해선 여러 요소 다 중요하지만 특히 청각적 부분이 중요한 거 같아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고 빠르게 잠이 들고,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 자도 효율적으로 잘 수 있는지 등을 고민해 수면의 질을 향상해 주는 음악입니다.
수면음악이 다른 음악과 달리 가지는 특징이 있을까요?
이거는 영업 비밀인데요(웃음). 간단하게만 설명해 드리면 우선 일정 패턴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이에요. 또 음악 외적으로도 ASMR(일상소음) 같은 음향적 부분이 섞여 있다는 게 특징이에요. 아기들도 양수 소리랑 비슷하다고 물소리 들려주면 잘 잔다 이런 얘기가 있잖아요. 이 외에도 새소리, 숲소리, 바람 소리 등 자연 음향을 활용해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듣는 방법도 따로 있을 것 같은데요?
일단 귀에 이물감이 있는 디바이스, 예를 들어 이어폰 같은 건 피해야 해요. 제일 좋은 건 휴대폰 스피커로 듣는 건데 휴대폰이 가까이 있으면 다른 활동을 할 수 있어서, 멀리 충전기에 꽂아 놓고 듣거나 블루투스 스피커를 이용하는 게 좋아요. 이때 볼륨은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로 해서 주변에 들리는 백색소음과 함께 듣는 것이 좋습니다.
유튜브에서 수면 유도 음악이 쏟아지는 데, 어떻게 보시나요?
사실 이게 제가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예요. 지금 유튜브에 수면 유도 음악 영상들이 되게 많아요. 그중에는 터무니 없는 것도 되게 많죠. 실제로 아무런 과학적 근거나 데이터가 없음에도 수면에 도움이 된다하고 올려 놓고 조회 수 1억 뷰를 찍고 있는 형국이에요. 제가 실제로 조사해 보니 정말 데이터가 있는 영상은 하나도 없었어요. 영상 중 98%가 피아노 음악들인데 듣고 잠이 올 수는 있지만, 수면에 정말 도움 된다는 임상적 데이터가 없는 게 문제라는 거죠.
본인의 음악은 이들 음악과는 차별성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사실 무형의 예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면 그건 데이터밖에 없거든요. 이와 관련해 논문을 작성하면서 임상시험을 진행했어요. 대상은 대학병원 수면장애를 가진 50대 환자들이었고 이들에게 제가 직접 만든 수면음악을 처방했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 2주 뒤에 환자들에게 저의 음악이 수면에 도움이 됐는지를 놓고 설문조사를 진행했죠. 거기서 음악을 듣고 잔 다음 날 컨디션이 좋아졌다 는 등 도움이 됐다는 반응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끌어 냈습니다.
사람마다 수면 패턴·습관은 물론 음악 취향도 다른데 맞춤형 수면음악도 제작 가능할까요?
맞춤형 수면음악도 제가 논문의 한 연구 과제로 시행했어요. 수면 패턴이 각기 다른 다양한 직업군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어요. 그중에는 기업 총수, 운동선수, 연예인, 배우, 요리사, 와인 소믈리에 등 30명의 수면패턴과 음악 취향을 조사해 한명 한명 각각 다른 맞춤형 수면 음악을 준 적 있어요. 결과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수면의 질이 좋아졌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어요.
잠을 못 자는 사람 말고 잘 자는 사람에게도 수면 음악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수면음악이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아닐 거 같아요. 어떤 사람은 불면증은 없지만 정말 작은 소리로도 못 자는 예민한 사람도 있을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잠드는 시간이 단축될 수 있다는 점이에요. 보통 자려고 누운 뒤 30분 이상 잠들지 못하면 불면증이라고 해요. 이때 저의 수면 음악은 그 시간을 줄여 빠르게 잠들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는 거예요.
인공지능(AI)를 활용한 수면 음악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올해 초에 AI 자동작곡 시스템 기업과 손잡고 작업을 진행했어요. AI 작곡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딱히 수면 음악은 없더라고요. 먼저 제가 제작한 수면 음악 작곡 알고리즘을 AI 데이터로 입력해요. 이때 AI는 알고리즘 바탕의 작곡 규칙을 파악해 학습하며 음악을 제작하는 식이에요.
특히 수면음악은 반복패턴이 많아 기존 음악보다 딱딱 떨어지고 정확하게 계산되고 이런 것들이 중요해서 AI는 사람이 한 것보다 더 뛰어난 작업을 할 수 있어요. 매년 한 작품씩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콘서트 주최 측 "한국도 쉬는, 휴(休) 문화 필요"
지난달 열린 '도심형 휴(休)<음악치유 M>' 행사는 수면을 포함해 '휴식'에 방점을 찍은 행사다. 한국은 노동 시간이 길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짧은, 워라밸이 낮은 국가로 분류된다. 그중 노동시간은 연간 1915시간으로 OECD 국가 중 1등이다. 노동 시간 보장 수준도 뒤에서 3등이며 가족 시간 영역에서도 하위권을 기록했다. 여가 시간도 짧은 수준이다.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여가 시간(평일)은 2012년 3.3 시간에서 2019년 3.5시간으로 10년째 제자리걸음에 머물렀다.
같은 조사에서, 주로 하는 여가 활동으로 '휴식활동'이 61.5%를 차지했다. 이는 말 그대로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활동을 말한다. 스포츠(1.7%)나 문화예술 관람(1.7%), 문화예술 참여(0.6%) 등의 비중은 극히 낮다.
마포문화재단 측은 '도심형 휴(休)<음악치유 M>' 행사에 대해 "운영 중인 공연장을 이용해 휴식과 콘서트를 접목한 새로운 유형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싶었다"며 "콘서트가 음악을 듣고 즐기는 등 신체 에너지를 쓰는 활동이 아닌 음악을 들으며 편하게 누워 쉬거나 잠을 자는 등 말 그대로 휴식에 기초한 문화 사업으로 국민 복지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