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시간 치료했지만 못 살린 환자의 가르침
[김영훈의 참의사 찐병원 ]의학의 세렌디피티와 부정맥 치료
2001년 봄에 74세의 부정맥 환자가 입원했다. 우리 팀은 3차원 영상 진단기를 활용해 시술에 들어갔다. 전극이 부착된 카테라로 불리는 와이어를 통해 부정맥의 근원 부위라 생각되는 지점에 고주파 열에너지를 방출해 원인 세포를 태워 없애는 시술이었다. 하지만 원인 지점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모니터에 나타난 부위와 실제 부위가 다른가 싶어 여러모로 분석해 가며 에너지를 가해도 변화가 없었다.
수십 번을 했는데도 부정맥이 가라앉지 않았다. 문득 시계를 보니 8시간이 지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모니터를 보면서 그 원인을 찾고자 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이미 17시간이 지나 있었다. 팀원들은 입 밖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지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의 마음으로 원인에 접근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다.
그런데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환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진작 마취에서 깨어나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두세 시간이나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말했다.
“선생님, 인제 그만하시죠.”
내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나는 새로 도입된 3차원 영상 진단기를 통해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부정맥의 원인을 찾아내려 했고, 새로운 원인을 찾아내면 치료가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나는 굽히지 않고 환자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술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고맙습니다.”
그의 거절로 시술을 계속하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은 실패였다. 나의 지성이 부족해 감천까지 이르지 못한 것인가?
나는 지금도 “선생님, 인제 그만하시죠”라고 요청했던 그의 체념한 눈빛과 말을 잊지 못한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만 떠올리면 온몸에서 힘이 빠진다. 그날 이후 부정맥 3차원 영상 진단기를 이용한 시술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개선돼 어느 순간부터 성공적으로 수행됐다. 환자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겠다는 간절함이 통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지금 대부분의 부정맥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세렌디피티’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개봉한 ‘세렌디피티’를 통해 대중에게 이 용어가 알려졌는데, 이 영화가 남녀의 ‘운명적 만남’을 다룬 것이서 세렌디피티가 우연이나 운을 뜻하는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다.
세렌디피티는 국어사전에서 ‘완전한 우연에서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며 특히 과학 연구 분야에서 실험 도중에 실패해서 얻은 결과에서 중대한 발견 또는 발명을 하는 것을 이르는 외래어다.’로 풀이돼 있다.
세렌디피티는 우연(偶然)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연은 coincidence, chance, accident, (informal) fluke, happenstance 등으로 표기된다. 그야말로 우연이다. 그러나 세렌디피티는 그냥 완전히 우연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을 통해 실패의 끝에서 새로운 결과를 찾아내는 것이다.
유레카(eureka)로 유명한 아르키메데스가 그렇고,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도 그렇다. 페니실린이 의약품으로 상용화된 데에는 약리학자 하워드 월터 플로리와 화학자 언스트 보리스 체인 두 명의 공이 컸지만, 최초로 발견해 낸 플레밍의 공이 가장 크다. 페니실린은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약으로 손꼽힌다. 만약 페니실린 연구가 없었다면 현대 의학은 지금보다 몇 세대는 뒤처져 있었을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아르키메데스는 히에로 2세의 순금 왕관이 전부 금으로만 제작되었는지 밝혀내기 위해 몇날 며칠을 연구하다가 결국 목욕탕에 들어가는 순간 그 방법을 찾아냈다. 하루아침에 번쩍, 찾아낸 것이 아니다. 플레밍 역시 우연 히 푸른곰팡이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오랜 연구 끝에 발견했다. 이 외에도 역사에는 오랜 시간의 탐구를 거쳐 우연히 발견한 과학의 산물이 많다. 그 발견자들은 그것을 간절히 원했고, 스스로가 부단히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가 주어진 것이다.
세렌디피티에 따라 의학의 급격한 발전이 이뤄졌어도, 사람이 그 발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또다른 영역이다. 지금도 부정맥 돌연사는 여전히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질병은 길거리에서 돌연사한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나 소설가 스탕달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든, 중소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든 가리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우연은 우리 곁에서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평소에 자신을 잘 관리하면 숨겨져 있던 질병을 찾아낼 수 있고, 우연한 죽음도 막을 수 있다. 필자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해 뜻밖의 장소에서 의미 없는 죽음과 마주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는 모든 의료인의 소망이기도 하다.
미래에 시행될 부정맥 시술은 지금의 시술에서 한 단계 더 뛸 것이다. 환자의 심장에 처음부터 시술하는 것이 아니라 아바타 심장을 통해 심장의 어떤 이상으로 부정맥이 나타나는지 여러 번 재현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이에 근거해 마련된 최적의 기법을 찾아 환자에게 적용하는 순서로 진행, 최상의 성적을 얻을 것이다. 17시간씩 환자와 씨름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환자가 몸이 이상하다고 느끼면 병원과 의사를 찾아와야 한다. 그래야 ‘세렌디피티’를 발판으로 도약한 의학기술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