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률 86%' 치료 후의 삶... "백혈병 환우 서로가 희망의 증거"

[인터뷰] 9월 14일 CML 데이 개최... 루 산우회 박창후 연합회장

지난 5월 충남 금산에서 정기 캠프를 가진 루 산우회원 단체사진 [사진=루 산우회]

“희망은 좋은 거예요. 아마 가장 좋은 것일 거예요. 그리고 좋은 건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영화 쇼생크 탈출 중-

여기 산을 오르지 않는 산악회가 있다. 이름도 산악회가 아닌 산우회(山友會)다. 이들은 스스로 산이 아닌 ‘희망’을 오르는 동행자들이라고 부른다. 2005년부터 시작해 이제 20년 가까운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루 산우회' 이야기다.

‘루 산우회’는 백혈병의 영문 명칭인 'leukemia(루키미아)'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름대로 만성골수성백혈병(Chronic Myeloid Leukemia, CML) 환우들이 주축을 이뤘다.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속담처럼, 만성백혈병 투병이라는 길고 힘든 길 위에서 서로 손을 맞잡은 산우회원들은 서로에게 귀하디 귀한 버팀목이다.

항암제 부작용, 건강하게 땀 흘리며 이겨내

2000여명의 회원을 이끌고 있는 박창후 산우회 연합회장도 처음에는 홀로 고통의 길을 걸었다. 2008년 봄, 갑작스레 체중이 10kg 넘게 빠지고 피곤함을 느껴 찾은 병원에서 날벼락처럼 CML 진단을 맞닥뜨렸다. 골수 안에 성숙 단계의 백혈구가 과하게 증식하는 악성 혈액암인 CML은 성인 백혈병 환자의 약 25%에게 나타난다.

과거엔 생존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조혈모세포 이식이었을 정도로 위험한 병이었다. 그 방법마저 공여자를 찾는 것도 어렵고 이식 과정에서 환자의 면역력이 떨어지면 생명이 위험했다. 하지만 2001년 최초의 표적항암제 ‘글리벡(성분명 이매티닙)’이 등장하며 상황은 바뀌었다.

약의 등장으로 CML 생존율은 86%까지 올라갔고 환자들은 ‘치료 이후의 삶’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박 회장은 해당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알려진 을지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김동욱 교수(당시 서울성모병원 재직)를 찾아 치료를 이어갔다.

그러나 약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견디기 힘든 부작용이 일상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글리벡을 오래 복용하면 환자마다 다양한 부작용이 생깁니다. 제 경우엔 1일 800ml를 복용했는데, 손발에 나타난 부종 때문에 아무것도 못할 정도였어요. 이걸 극복하려면 건강하게 땀 흘리는 방법밖에 없겠다 싶었죠.”

박 회장은 퇴근 후에 무조건 걸으며 부작용과 싸웠다. 밤늦게 퇴근하는 날에도 빠짐없이 집 근처부산 광안리 바닷가를 걸었다고 한다. 그러던 2009년, 김동욱 교수의 소개로 루 산우회 정기 캠프를 만났다. 그리고 여기서 의지할 수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만났다.

“루 산우회는 일반적인 산악회와 다릅니다. 우리의 목표는 산 정상이 아니라, 공기 좋은 산과 물을 따라 걷는 겁니다. 치료는 의사가 하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심리적 안정을 얻는 거죠.”

루 산우회는 매년 5월이 되면 1박 2일 정기 산행 캠프를 개최한다. 매달 서울, 경기, 경상, 강원, 전라, 충청, 제주 등 7개 지부가 개별 모임을 가지기도 한다. 현재 활동 회원 수만 2,000여명에 이른다. 박 회장은 “이 정도로 활성화된 CML 환우 커뮤니티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건강하게 땀 흘리자’는 그의 다짐 덕분일까, 박 회장은 2016년 완치 판정을 받았다. 180cm 넘는 키에 꼿꼿한 체구를 자랑하는 박 회장은 이제 환우들 사이에서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다. 다른 환우들이 ‘나도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박창후 회장이 루 산우회와 관련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최혜림 인턴기자

완치 후에도 그는 회장직을 수행하며 같은 부작용으로 고생하는 ‘후배 환우들’에게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 글리벡의 흔한 부작용 중 하나인 눈 충혈은 ‘절대 비비지 말고, 키친타올을 찬물에 적셔 찍으면’ 완화할 수 있다는 식으로, 실제 치열하게 고민한 경험을 전하고 있는 것.

9번 22번 염색체 이상... 매년 9월 22일은 CML데이

산우회에선 부작용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신체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경제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활동도 진행한다.

“기존에는 산우회 차원에서 돈을 모아 재정적으로 어려운 회원들을 지원했는데, 이런 방식은 꾸준하게 이어지지는 않더라고요. 계속 도움을 받는 걸 미안해하시는 분도 있고, 실질적 도움이 안된다고 느꼈던 환우도 있었겠죠. 이후에는 돕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루 산우회는 매년 약 500만 원 규모의 지원금을 ‘선결제 방식’으로 을지대 의료원에 전달해오고 있다.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의 진료비 부담을 덜기 위한 목적이다.

CML 치료의 세계적 권위자로 알려진 김동욱 교수도 산우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홈페이지에서 무료 상담을 진행하는 등 이러한 행보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 중 돋보이는 것은 ‘CML 데이(Day)’다.

김동욱 교수와 루 산우회는 2011년부터 ‘만성골수성백혈병의 날(CML Day)’을 공동으로 열고 있다. CML이 23쌍의 인간 염색체 중 9번과 22번 염색체의 이상으로 발병한다는 점에 착안해 9월 22일로 지정됐다. 매년 열리는 기념 행사에선 CML에 대한 학계의 최신 임상시험 결과나 연구 동향을 소개하고 표적항암제의 올바른 복용법, 부작용 대처법 등에 대한 교육이 이어진다.

“환자들은 당장 생명이 위험한 단계가 지나면, 처음 가졌던 ‘약 열심히 먹어야지’하고 다짐한 것이 해이해지기 쉬워요. CML 표적항암제는 무엇보다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복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CML 데이를 통해 환자들이 느슨해진 정신을 붙잡도록 돕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투병 중인 회원들이 완치된 환자들을 만나고 희망을 유지하는 만남의 장소를 제공하려는 목적도 있죠.”

올해 CML 데이 기념 행사는 9월 14일 의정부을지대병원에서 열린다. 지난 3년간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온라인 행사만 개최했던 탓에, 오랜만에 열리는 대면 행사에 환자들의 기대가 크다. 박 회장은 “암과 관련해선 특히 민간요법 같은 검증되지 않은 지식이 많은데,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 모이는 이런 행사가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환자들이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의사의 치료 방법을 잘 따르면서 자기 관리하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위로와 당부의 말을 건네며 “외롭게 투병하고 있는 환우에게 산우회는 언제나 열려있다. 모두가 완치하는 그날까지 언제나 함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진=루 산우회]
    장자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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