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아과 의사의 감정 노동

[김용의 헬스앤]

우리 아이에게 꼭 필요한 필수 의료인 소아청소년과가 저수가-저출산 태풍에 휘청거리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 소아과가 사라지면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내 아이에게 돌아올 수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례 1) 동네병원 의사 A씨는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건강정보 프로에서 들은 얄팍한 지식으로 고집을 피우거나 특정 약을 처방해달라고 떼를 쓰는 환자도 있다. 부드럽게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퇴근 후 아내와 술 한 잔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게 일과다.

사례 2) 기업 고위 임원인 B씨는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부하 직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렇다고 대놓고 야단도 못친다. 자칫하면 갑질 논란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평사원 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선배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맞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후배를 섬기고 봉사하는 서번트 리더십이 최근 강조되면서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

‘감정 노동’은 실제 감정을 속이고 웃는 얼굴로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노동을 말한다. 손님을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 백화점 판매직 사원이나 여객기 승무원 등이 곧잘 사례로 등장한다. 하지만 요즘은 의사, 대기업 고위직도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시대다. 과거처럼 섣불리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가 월급쟁이는 사표까지 써야 한다.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진 꼰대라는 비아냥도 들을 수 있다.

세상이 너무 변했다. 모든 사람들이 감정 노동의 대상인 시대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직업은 말, 행동 하나 하나를 조심해야 한다. 익명으로 글을 올리는 온라인 사이트의 가십 거리가 되고 영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별점 테러도 당해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 그렇다고 하소연할 데도 마땅치 않다.

최근 감정 노동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분야가 소아청소년과(동네병원) 분야다. 자신의 증상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 환자가 많다 보니 부모가 같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아과 의사는 예전부터 아프다고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진료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부모가 진료 과정에 과도하게 개입할 경우 아이, 부모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의사의 진료가 마음에 안 든다고 전후 사정을 살피지 않고 온라인에 악성 후기를 쓰는 경우도 있다.

가뜩이나 저수가에 저출산까지 겹쳐 병원 운영이 버거운데 환자 상대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져 이 참에 폐과를 하겠다는 소아과 의사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병·의원에 대한 민원 조사와 평가가 환자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의사들 입장에선 억울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무리하게 의사의 진료 과정에 개입해 항생제 처방을 요구하며 언성을 높여 마음 고생이 심하다. 아이 건강을 위해 항생제 남용을 자제했는데 오히려 항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일반 사업장은 가격을 자유롭게 책정할 권리가 있고, 진상 손님을 거부할 권리가 있지 않지만, 의사들이 진료를 거부하면 처벌받는다. 의료법은 의료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거나 진료하지 않는 경우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료 수가(가격)도 국가에서 정해 비급여(건강보험 미적용) 항목이 있으면 환자나 가족에게 일일이 설명해줘야 뒷탈이 없다.

소아청소년과는 이른바 필수 의료다. 우리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의료 분야다. 그럼에도 진료-병원 환경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폐과를 고려하는 의사들이 늘고 있다. 요즘 의대 열풍이 불고 있지만 의대 졸업생들은 특정 인기과로만 몰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민원이 적고 여유 시간이 많은 분야다. 쉽게 말해 스트레스가 적은 과가 인기를 얻고 있다. 한 의사는 “월급 4~5억 원을 내건 지방 병원에 뜻밖에 의사 지원이 적은 것은 과도한 간섭이나 업무 부담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돈 보다는 삶의 여유를 찾겠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처럼 의사도 일과 삶의 균형(워라벨)을 중시하고 있다.

과거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수직적’인 시대가 있었다. 의사가 일방적으로 지시를 해도 환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의사가 의료 지식과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에 환자는 어려운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귀를 열어 두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각종 매체를 통해 건강 정보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건강 프로가 방송되고 있다. 건강 정보를 줄줄이 꿰는 환자들도 있다.

이제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쌍방향 소통 시대다. 의사는 환자와 눈을 맞추며 쉽게 설명하고 환자들은 얕은 지식으로 의사를 번거롭게 해선 안 된다. 의사와 환자가 진정으로 소통하면 병세가 좋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사회 전반에 불신이 난무하고 있지만 생명을 다루는 의료 분야는 끝까지 신뢰가 굳건해야 한다. 환자가 주치의를 못 믿으면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아이에게 꼭 필요한 필수 의료가 저수가-저출산 태풍에 환자의 불신까지 더해지면 안 된다. 우리 동네에서 소아과가 사라지면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내 아이에게 돌아올 수 있다.

서울 종로의 한 병원에는 90세가 넘은 노의사가 오전 진료를 한다. 그는 “이 나이에 돈 때문에 일하겠어요? 젊을 때 보던 단골 손님의 손자들이 ‘할아버지 의사’를 찾으니 은퇴했다가 불려 나왔다”고 웃었다. 동네병원은 수십 년 동안 뿌리를 내린 곳이 많다. 환자-의사라는 딱딱한 관계 이상인 경우가 적지 않다. 소아과는 이제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의 건강을 돌보는 곳이다. 가뜩이나 저출산 시대에 풀이 죽은 소아과 의사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건네보자.  “앞으로 우리 손자도 진료 부탁드려요~ 파이팅!”

    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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