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별 수가' 고집 버려야 '한국 의료' 산다
신현영·조명희 의원실, 가치기반 의료 제도 전환 토론회 개최
최근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필수의료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대안으로 환자의 건강과 진료 결과에 중점을 두는 '가치 기반 의료 체계'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지금의 상황은 국내 의료·보건 시스템이 한계에 봉착한 결과란 분석이다. 특히 그간 진료비를 산정해 온 기준이었던 '행위별 수가'(FFS) 제도를 극복해야 우리 의료·보건 시스템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제언이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실과 국민의힘 조명희 의원실, 더불어민주당 보건의료특별위원회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가치기반 의료, 왜 중요한가?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주제로 제4차 의료현안 연속토론회를 진행했다.
▶행위별 수가, 한계 봉착... 의료시장 왜곡 불러와
현재 우리나라 의료·보건 시스템은 행위별 수가를 원칙으로 의료비를 산정한다. 의료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의료행위마다 항목별 가격을 책정해 그 총합을 지급하는 것이다. 의료계 일각에선 행위별 수가제 도입 이후 국내 의료·보건 환경이 급변해가면서 과잉진료, 진료 품질 저하, 의료 인력 노동가치의 저평가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자주 지적되는 부분이 과잉진료에 따른 의료재원 낭비 문제다. 행위별 수가제에선 시술이나 진료가 많이 필요한 질병에 대해서는 그에 비례해 진료비도 많이 발생한다. 문제는 일각에서 이를 더 많은 진료비를 지급받으려고 악용한다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환자'가 '최대한 자주' 진료받도록 유도하는 행태다.
더 나아가 이런 악용 행태는 환자들이 의사에게 진료받는 시간을 빼앗아 진료 품질도 저하할 수 있다. 이런 탓에 일부 대형병원들이 외래 환자를 많이 받기 위해 환자당 최소한의 진료 시간을 할당하는 일명 ‘3분 진료’ 관행이 시작됐다는 지적도 있다. 동시에 이는 의료기관이 인건비를 최소화해 최대한의 수익을 뽑기 위한 목적이기에 의료인의 노동가치가 저평가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는 또한 현재의 필수의료 위기를 불러온 수익이 높은 인기 진료과와 수도권으로의 의료인 쏠림 현상을 일으킨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런 탓에 의료계에선 '시장 논리에 부합하는 의료 서비스 제공'이라는 행위별 수가제 도입 당시의 명분이 퇴색해 오히려 의료시장을 왜곡한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이유로 제도 개선 방안을 고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의료서비스를 단가를 낮추면서 의료기관은 낮아진 단가만큼 품질 낮은 의료서비스의 제공량을 늘리는 악순환이 일어난다는 우려도 있다.
이날 토론회 패널들은 현행 행위별 수가제의 한계를 보완할 대안으로 '가치 기반 의료 제도'를 제안했다. 진료 행위별로 금액을 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제공자(의사)와 의료서비스 이용자(환자)의 공통된 가치에 대한 금액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환자의 건강상태’라는 결과적 가치를 예로 들 수 있다. 환자가 질병에서 회복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료서비스의 최우선 가치로 두고 이에 적절한 금액을 산정해 의료행위의 건수보다는 품질에 집중하도록 제도가 지원하는 것이다.
앞서 미국에선 2014년 일명 ‘오바마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개혁법(ACA)' 제정을 계기로 가치 기반 의료제도를 도입했다. 기존에는 의사들이 제공하는 진료행위의 양이 늘어나야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지만, 이 이후론 의료진이 환자들의 건강 상태를 개선할 때 더 많은 수익이 생기도록 의료수익 구조를 개편한 것이다.
이 결과 미국의 각 병원에선 환자들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불필요한 진료와 의료비용을 절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절감한 비용은 보험 제공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병원의 수익으로 인정해주기도 했다. 의료계는 이 과정에서 미국 내 의료기관과 병원들을 중심으로 비용 효율적인 협력과 분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 "가치기반 의료 전환이 의료 붕괴 해결책"
이날 토론회에서 발표를 맡은 서울대 의대 오주환 교수는 “가치기반 의료는 최근 지적되고 있는 필수의료 붕괴의 실질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며 “필수의료가 붕괴하는 것은 상당 부분 행위별 수가제 때문”이라고 말했다. 행위별 수가제에서 상대적으로 싼 가격이 매겨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공급자, 대표적으로 소아과 의사들은 시간이 갈수록 손해를 감당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오 교수는 “나중에는 아무리 환자에게 필요해도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일차의료개발센터 박성대 교수는 "가치기반 의료 제도로 전환하기에 앞서 시범사업이 필요하다"며 "의료 과정이 아닌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는 방식을 시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차의료기관의 기능을 강화하면 한국형 주치의 모델을 만들 수 있다. 내원 여부와 상관 없는 지속적 관리를 통해 가치기반 의료제도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 박춘선 의료체계개선실장은 "제도 개편을 위해선 의료 현장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먼저"라며 "중증질환, 응급 심혈관질환,어린이 진료 등의 영역에서 진료의 양보다 가치에 보상하는 지불 모형과 더 나은 진료 접근성을 보장하는 의료전달모형이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보건복지부는 박 실장이 언급한 세 가지 영역(중증, 응급, 소아)에 대한 가치기반 의료 시범사업 계획을 올해 초 발표한 바 있다.
패널 토론에 나선 인하대 의대 임종한 교수는 “지난 30년간 지속된 의료 제도를 개혁하는 중요한 시점에선 정부와 의료제공자 간 충분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지금까지 정부가 시도했던 의료제도 시범사업처럼 대응하면 신뢰를 얻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임종한 교수는 “국민들의 인식도 중요하다. 건강 보험은 우리 사회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며 “자신이 낸 건강보험료만큼 의료 서비스를 ‘타 먹지 못하면’ 손해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시민들의 인식을 전환하기 위한 캠페인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가치기반 의료제도의 도입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대한의사협회 우봉식 의료정책연구원장은 가치기반 의료의 필요성에는 동의하면서도 “의료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이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방향성은 분명 바람직하지만 현행 제도와 최대한 상호보완하면서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장에 나온 보건복지부 강준 의료보장혁신과장은 "의료 제도 개편을 위해서는 지불제도 외에도 병상과 인력의 확보, 보험제도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며 "이미 시행 중인 세 가지 시범사업을 통해 제도 전환의 근거를 확보하고, 하반기에 제2차 건강보험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가치를 우선하는 의료 정신'을 반영해 신뢰를 쌓는 첫 단계로 삼을 것"이라고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