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력은 유전적이어서 어쩔 수 없다?
[김영훈의 참의사 찐병원] 병의 여러 원인과 대처
“머리가 지끈거리고 멍하며 가끔 심하게 어지럽습니다.”
몸이 아파 병원에 오는 사람은 의사에게 왜 아파서 왔는지 말한다. 의사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환자의 상태를 EMR(Electronic Medical Record 전자 의무기록 시스템)에 입력한다.
“언제부터 그러셨나요?”
“사나흘 되었습니다.”
환자는 간혹 이렇게 덧붙인다. “십수 년 전부터 같은 증세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도 그랬고, 여동생도 그렇습니다.”
환자는 이른바 ‘가족력’을 강조한다. 그는 병원에 오기 전 주위 사람들에게 ‘가족력은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을 것이다.
또 간암으로 사망한 사람의 아들이나 딸이 간암으로 사망하는 사례를 직접 목격했거나 친구의 친구를 통해 들었을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을 왜곡해 질병의 유전자가 피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졌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가진 질병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진단을 내린다.
의학 교과서에서 가족력(Family History)은 ‘양친, 조부모, 형제자매, 남편, 아내, 아이들, 그 밖의 혈연자 질환의 유무, 원인 등을 기재한 것. 특히 유전적 또는 체질적 부하(負荷)가 있는 질환을 문진하고 진단의 자료로 도움이 되게 한다’로 정의한다.
대표적 질병은 암, 알츠하이머(치매), 당뇨병, 심혈관병 등이다. 만성 두통, 빈혈, 고혈압, 고도 비만 등도 가족력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가족력은 유전자에 심어져 내려오기에 대부분은 치료가 불가능하고,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아픔이라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심각한 병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하는 사람의 식습관과 생활 습관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여러 가지 나쁜 요인이 담겨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무절제한 음주, 오랫동안의 흡연, 불규칙한 식사, 수면의 불안전성, 과도한 스트레스, 운동 부족 등이다. 이 모든 것에 해당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식습관만으로도 병에 걸릴 수 있다. 음식을 지나치게 짜게 먹는다든지, 채식은 전혀 하지 않고 고기만 먹는다든지, 커피나 탄산음료를 지나치게 많이 마신다든지,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는 것만으로도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온다.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하기 이전 그리스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알크메온(Alkmaion, 기원전 5세기 전후)은 ‘질병이란 신체 구성 요소들의 균형이 깨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2500년 전의 주장이지만 지금도 유효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 치유를 첫 번째 치료 방법으로 삼았고, 두 번째로 식이 요법을 적용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은 예나 지금이나 건강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짠 음식, 매운 음식은 건강에 해롭다. 한 집안에서 아버지가 짭짤한 음식을 좋아하면 어머니는 대체로 음식에 소금과 간장을 더 많이 넣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면 고추를 더 많이 넣는다. 치킨을 시켜 먹을 때도 매운맛을 주문한다. 아이들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어머니의 입맛에 자연스레 적응해 간다. 이 식습관이 10년, 20년 동안 쌓이면 몸은 이상 반응을 일으키고 끝내는 질병을 유발한다. 결국 가족력이 되는 셈이다. 가족력은 이처럼 유전 외에도 후천적으로 가족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의학, 질병, 수술과 시술 관련 데이터는 아직 빅데이터에 이르지 못했다. 소유하고 있는 기관도 각자이다. 그런 만큼 활용도는 아직 낮다. 그러나 데이터가 쌓이고 AI를 이용해 분석하다 보면 가족의 역사로 발생한 질병도 원인을 찾을 수 있고,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병원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거쳐 온 가족의 역사를 분석해 어떤 특징이 있는 가족인지, 어떤 생활 습관과 식습관을 지닌 가족인지 분석해 현재 나타난 질병의 치유에 가장 적합한 치료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 전에, 나에게 가족력이 있다고 한탄하거나, 할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으니 나 역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비관적으로 예측하는 미련함을 떨쳐야 한다.
가족력도 있지만, 사회력도 있다. 사회 전체가 특별한 질병으로 고통에 처한 상태이다. 그러나 사회력도 치료할 수 있다. 캄보디아의 ‘철 물고기’가 이를 입증한다.
메콩강은 ‘물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세계에서 13번째로 큰 이 강은 티베트에서 발원해 미얀마·라오스·태국·캄보디아·베트남을 지나 바다로 흘러 든다. 무려 6개 나라를 거치는 긴 강이다. 이 메콩강 유역에 사는 캄보디아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공통으로 앓은 질병이 있었다. 바로 빈혈이다. 빈혈(Anemia)은 캄보디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많은 사람이 앓고 있는 질병이다. 대략 20억 명이 빈혈로 고통을 받는다. 빈혈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의학 사전에서는 그 원인과 증상을 이렇게 분류한다. 사실 모든 질병은 단 하나의 원인만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혈색소의 주재료인 철분 부족으로 발생하는 철 결핍성 빈혈
-혈구 세포를 구성하는 DNA를 만드는 데 필수인 비타민 B12나 엽산 결핍으로 발생하는 거대적 아구성 빈혈
-골수의 조혈모 세포가 없거나, 조혈 시스템에 이상이 발생할 때
-골수의 보상 능력을 앞서가는 용혈(溶血)이나 실혈(失血)
-만성 질환이 원인인 염증 물질 과다로 조혈이 안 되는 급만성 염증으로 생기는 빈혈
설명은 매우 어렵지만, 빈혈의 최대 원인으로는 보통 철분 부족이 꼽힌다. 고기, 생선을 포함해 음식을 골고루 꾸준히 먹는 것이 예방에 가장 좋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좋은 음식을 매일 먹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나라 전체가 부유하지 못하면 당연히 빈혈 인구가 많다. 메콩강의 오염으로 생선을 충분히 먹지 못하는 캄보디아도 그러한 나라 중 하나다. 2008년 캐나다 의사 가빈 암스트롱은 캄보디아의 빈혈 조사를 해 여러 결과를 얻었다. 국민 1500만 명 중 약 40%인 600만 명이 빈혈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과 이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무쇠솥으로 밥을 짓거나 음식을 조리하면 철분을 섭취할 수 있지만 가난한 국민은 무쇠솥을 장만할 수 없어 대부분 값싼 알루미늄 솥을 사용했다. 암스트롱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무쇠(철 덩어리)를 찌개나 국에 넣고 끓이는 방법이었다. 암스트롱은 무쇠를 주먹 크기로 잘라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나 이 쇠를 넣고 음식을 끓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몸에 좋다 해도 시커멓고 네모난 철덩어리를 찌개에 넣고 끓이는 것은 거부감이 든 탓이었다. 사람들은 이 철 덩어리로 책상을 받치거나 문을 괴는 용도로 사용했다. 암스트롱의 아이디어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또 다른 아이디어로 발전시켰다.
쇠로 물고기를 만든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물고기는 행운을 상징한다. 그래서 쇠를 녹여 손바닥 크기의 물고기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덕분에 거부감이 훨씬 줄어들고, 행운의 상징이라는 믿음으로 ‘철 물고기’는 서서히 캄보디아 사람들의 찌개와 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암스트롱은 사회적 기업 ‘행운의 철 물고기(Lucky Iron Fish)’를 차려 본격적으로 판매에 나섰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가격인 3달러(약 3000여 원)로 책정하자 철분 보충제를 이기고 캄보디아 전역으로 팔려 나갔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철분 부족으로 생기는 빈혈 인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철 물고기는 현재 80곳 넘는 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다. 부자 나라에서는 비싸게 팔고, 가난한 나라에서는 아주 싼값에 판매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빈혈 인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과거와 달리 가마솥을 사용하지 않고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어먹는 것도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된다. 한 아이가 태어나 20~30년 오직 알루미늄 솥으로만 지은 밥을 먹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빈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머니와 딸이 동시에 빈혈을 앓는다면 가족력이라 지레짐작하고, ‘치료가 어렵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잘못된 진단을 내린다.
만일 딸아이가 “내가 아픈 것은 순전히 엄마 때문이야”라고 말한다면, 그보다 더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자기 환경, 식습관, 생활 방식을 먼저 돌아보지 않고 핑계거리를 찾는다. 만만한 것이 ‘가족력’이다. 그러나 가족력의 상당 부분은 ‘유전자를 통해 물려받은 질병’의 측면보다는 그 가족을 둘러싼 환경, 즉 가족의 식습관과 생활 습관에 큰 영향을 받는다.
9세기 이슬람의 대표적 의학자인 알라지(Rhazes, 라틴어로는 ‘라체스’라 부른다)는 근대적 관점에서 볼 때도 역사상 매우 뛰어난 의사 중 한 명으로 꼽히는데, 그는 ‘환자의 고통스러운 마음은 얼굴에 드러난다. 이 사실만으로도 정신과 육체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식습관과 환경 위생이다. 올바르고 규칙적인 식사, 깨끗한 환경과 철저한 위생이 질병을 막아 주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철 결핍성 빈혈이 많은 것은 가족력도, 사회력도 아니다. 잘못된 식습관, 혹은 어쩔 수 없는 식문화에 비롯한 것이 많다. 그것을 타파하고 개선하면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지켜 나갈 수 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미래의 의학과 병원이 현재보다 눈부시게 발전할 것은 분명하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과학기술 덕분에 첨단 장비와 시스템, 엄청난 양의 의료 데이터가 질병 퇴치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개인의 의지와 사고방식이다. 수술 로봇은 복잡한 수술도 너끈히 해낼 수 있지만, 빈혈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 강제로 철분을 먹이지는 못한다. 자기 손으로 먹어야 한다.
코로나19가 지구촌을 휩쓸 때 손 씻기를 줄기차게 계몽할 수는 있지만, 그 손을 씻는 사람은 그 자신이다. 스스로가 실천해야 한다. 나아가 가족의 사고방식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가족이 긍정적이고 밝은 사고방식을 지녔다면 그 가족은 대체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한다. 반면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 늘 사회의 어두운 부분만을 비판한다면 가족 전체의 삶도 덩달아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