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지 않는 날이 더 불안”…폭력에 몰수 당한 마음

[윤희경의 마음 건강]

아동 학대는 피해자들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태어날 때부터 저는 너무 불행하게 태어났어요.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의 무관심으로 저는 날마다 불안한 시간을 보냈어요. 오히려 맞지 않는 날은 마음이 불안했어요. 맞으면 편하고 아버지가 친절하면 더 두려웠어요. 이러다가 언제 돌변할 지 모르니까요. 세상은 불공평하게 저를 왜 저런 사람 자식으로 태어난 것인지 너무 원망스러워요.”

최근 여러 아동 학대 사건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되는 극단적 사망 사례는 아니더라도, 많은 아이들이 여전히 가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노출돼 있다. 위 사례처럼 폭력적 상황에 길들여진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인간에게 살고자 하는 욕구는 ‘본능’이다. 태어난 직후부터 우리는 살기 위해 다양한 감정 표현을 한다. 때에 따라 울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도, 웃으면서 부모를 비롯한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성장해 나가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환경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을 학습하고 선택한다. 상황에 따른 대응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즉, 기뻐해야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프고,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는 법을 배우는 셈이다.

어릴 때부터 이어진 부모의 학대와 이유없는 폭력은 아이의 이러한 감정 표현 능력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도록 만든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하는 지도 모르는 그런 혼돈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혼돈이 넘치면 아이는 결국 무기력하게 된다. 문제가 자신을 덮쳐 반응하고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대응을 못하게 된다. 대부분 감정은 폭력에 함락되고, 고통스러운 감정과  경험만 남는다. “너무 무섭고 힘든데 나는 할 수 있는게 없어 ”

더욱 무서운 일은 고통에 대해 둔해짐과 동시에 자신을 소중히 다룰 줄 모르게 된다는 점이다.  학대의 결과는 자기 비하와 연결되기 쉽다. 자신을 소중히 다루지 않을 뿐 아니라 남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해도 나는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연민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그 사람을 피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 속에 머물며 살아간다. 자주 죽음을 상상하고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우울한 날들이 이어지면서 삶은 어두운 그림자만 끝없이 이어지는 숲 속에 갇히는 것이다.

게다가 아동 폭력의 피해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부모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도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다. 어떤 이들은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부모의 폭력적인 모습은 답습하지 않더라도, 자아를 온전히 보존하기란 쉽지 않다. 마음 속에는 본인은 운 없는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이같은 피해 의식 속에서 가족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맺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고통은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면서 또다른 그늘을 재생한다. 아동 학대의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의 시작점을 짚어보는 것이다. 폭력적 부모라는 불행의 출발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본인이 잘못해서 학대를 받았다는 잘못된 인과 관계를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에는 온통 몰수 당한 본인의 감정을 찾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상황에 대응하는 감정을 찾는 학습이 필요하다. 물론 이같은 작업을 혼자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들 대부분은 생존을 위해 일어설 수 있는 감정의 팔과 다리를 모두 잃은 상태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학대를 받아온 아동을 위한 장기적이고 세심한 상담과 지원이 이뤄져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지속되는 학대로 망가진 기본적 생존 기능, 즉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채고 표현하는 능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애초에 아동 학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구멍을 원천 봉쇄할 수 없다면 생존자들을 끝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다리를 연결해주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린이에게 돈이나 맛있는 음식을 주는 것보다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불우한 사람에게는 그들 자신의 어려운 고비를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19세기 영국 지성계를 이끌었던 인물 중 한 명인 존 러벅의 말은 2023년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윤희경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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