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하반신 마비 장애인 다시 걸었다
뇌와 손상된 척수, ‘디지털 브릿지’로 연결해 자유의지 보행
12년 전 자전거 사고로 목 아래 척추가 손상돼 하반신 마비가 된 남성이 다시 일어나 걷게 됐다. 뇌와 손상된 척수 사이에 ‘디지털 브릿지’를 이식한 올해 40세의 이 남성은 수술 후 계단을 오르고 한 번에 100m 이상을 걸을 수 있게 됐다. 24일(현지시간) 《네이처》에 발표된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EPFL) 연구진의 논문을 토대로 가디언과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한 내용이다.
주인공은 2011년 중국에서 자전거 사고로 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네덜란드인 거트 얀 오스캄. 그는 “몇 달 전, 10년 만에 처음으로 일어서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라며 ‘뇌-척추 인터페이스’라는 이 디지털 브릿지가 자신의 삶을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지난주엔 페인트칠을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행기와 페인트를 들고 서 있는 동안 혼자서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그가 다시 일어나 보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EPFL의 그레고리 쿠르틴 교수(신경과학)가 이끄는 연구진의 최신 연구 성과다. 이들의 목표는 척수 신경이 끊어져 쓸모 없어진 근육과 뇌를 무선신호로 다시 연결하는 것.
연구진은 2018년《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컴퓨터에서 전기 펄스로 하부 척추를 자극하는 기술을 집중훈련과 결합하면 척수 손상을 입은 사람이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오스캄은 당시 이 실험의 참가자 중 한 명으로 한 번에 여러 걸음을 내딛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움직임은 로봇처럼 딱딱했고 버튼이나 센서로 작동해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EPFL의 신경외과 전문의인 조슬린 블로흐 교수는 오스캄의 두개골에 2개의 전극 그리드를 삽입해 다리를 움직이려고 할 때 신경 활동을 감지할 수 있게 했다. 오스캄이 걷고자 하면 이 두개골 임플란트가 뇌 피질의 전기 활동을 감지해 오스캄이 배낭에 메고 다니는 컴퓨터에 신호를 보낸다. 컴퓨터는 다시 무선신호를 보내 척추 펄스 발생기에서 전기 펄스를 발생시킨다. 이 펄스는 이미 척추에 이식돼 있는 전극으로 전송돼 척수신경을 활성화해 엉덩이, 무릎, 발목 근육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쿠르틴 교수는 이전의 장치가 로봇의 걸음걸이를 생성하는 “사전 프로그램 된 자극에 가까웠다"면 새로운 시스템은 “오스캄의 생각을 포착하고 그 생각을 척수 자극으로 변환해 자발적인 다리 움직임을 다시 설정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제 오스캄은 자극의 매개변수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멈출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고, 계단을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오스캄도 “이전에는 자극이 저를 통제했지만 이제는 제가 생각을 통해 자극을 통제하고 있다”면서 “한 걸음 내딛자는 생각을 하면 생각하자마자 시뮬레이션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 장치는 빠르고 부드러운 보폭을 만들어내지는 못해도 일어서는 것과 걷는 것이 생각에 의해 시작되고 제어되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가능해졌다고 그는 설명했다.
디지털브릿지 장치는 또한 재활을 촉진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오스캄은 뇌-척추 인터페이스를 착용하고 40회의 재활 세션 끝에 자발적으로 다리와 발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되찾았다. 척추 신경이 일부 살아있던 오스캄은 시스템이 꺼진 상태에서도 다리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됐다. 쿠르틴 교수는 뇌와 척추를 다시 연결하면 척추신경이 재생돼 환자의 잃어버린 통제력을 일부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쿠르틴 교수는 오르캄의 경우 척수 손상 시점이 10년을 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척수 손상 후 몇 주 후에 디지털 브릿지를 적용한다고 상상해 보라”며 “회복 가능성은 엄청나다”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향후 소형화된 장치를 통해 뇌졸중 환자와 마비 환자가 걷고, 팔과 손을 움직이고, 척수 손상의 영향을 받는 방광과 같은 다른 기능 제어에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팔과 손의 움직임은 걷는 것보다 더 복잡하기 때문에 더 어려울 수 있다. 연구진은 현재 유사한 장치로 팔의 움직임을 회복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3명의 실험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