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에도 '자극'만? 언론·사회 정신건강 '악순환' 갇힌다
트라우마 축적되며 사회적 성숙 막아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언론'이 아닌 '트라우마에 공감하는 언론'이 돼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언론계와 각 언론사가 트라우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대응할 때 취재와 보도역량이 더욱 높아지는 것은 물론 사회 전체도 성숙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언론인 트라우마 위원회와 구글뉴스이니셔티브는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언론인 트라우마 실태 및 가이드북 1.0 발표회’를 개최했다.
각계 전문가와 주요 언론단체는 위원회를 통해 약 3년 동안 언론인의 트라우마 실태와 원인을 연구하고 가이드북 등 여러 해결 방안을 마련했다. 이날 회견은 각 언론사가 △기자 직군이 트라우마 고위험군이란 사실을 인식하고 △트라우마를 잘 이해하는 조직이 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 "트라우마 공감 언론, 언론의 번영과 발전 위한 길"
이날 전문가들은 저마다 기자 직군이 트라우마 고위험군이란 점을 역설했다. △사고와 참사 현장을 직접 진입해 취재하면서도 △취재 과정에서 개인의 감정을 억제하거나 분리하고 △사고 이후엔 관련 자료·사진·영상을 검토하고 편집하며 △디지털 괴롭힘(악성 댓글, 온라인 스토킹 등)에 쉽게 노출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신적 스트레스에 노출한다는 이유에서다.
과거부터 언론계에선 기자 개인이 각종 사고와 참사 현장에서 받는 충격을 두고 '이걸 감당하지 못하면 기자를 할 수 없다'고 말하던 풍조가 있었다. 트라우마 치유와 융 정신분석 전문가인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찬승 사회공헌특임이사(마음드림의원)는 이에 대해 부정과 억압이라는 '원시적인 방어기제'라고 평가했다
향후 보다 성숙한 방어기제로 대응하기 위해선 '인간이라면 누구나 충격과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다'는 인정의 태도와 함께 조직이 이를 함께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예방과 치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트라우마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함께 정서적 이해도 갖춘 '트라우마 공감 언론'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정 이사는 이같은 태도의 변화가 수반될 경우 고위험군인 기자 직군을 트라우마에서 보호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언론인들은 취재와 보도 과정에서도 트라우마를 가진 취재원을 더욱 잘 대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이정애 위원장(SBS 미래팀장) 역시 '가이드북 1.0'을 발표하며 같은 지점을 강조했다. 기자에 대한 트라우마 교육·보호 조치가 사고를 당한 피해 시민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더 좋은 취재 결과를 낳을 수 있단 것이다.
이 위원장은 가이드북 개발 과정에서 조언을 얻었던 영국 힐즈버러 사건의 생존자이자 재난관리 전문가인 앤 에어 박사를 인용해 "트라우마를 잘 이해하고 제대로 된 방법으로 취재와 보도를 한다면 오히려 유족이나 생존자의 트라우마 회복과 치유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트라우마 치유, 핵심은 '안전을 보호받을 권리-인류애 회복'
이화여대 심리학과 안현의 교수와 KBS 보도본부 문일경 전담 상담사 등은 기자 직군이 실제 직접적 트라우마에 노출하는 경우는 비교적 적지만, 업무상 일상적으로 크고 작은 트라우마 경험이 누적하기 때문에 고위험군으로 볼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언론 조직 내의 변화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안 교수는 "신체·정신적으로 안전을 보호받는 일은 언론인 등 특수 직군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진 권리"라면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새로운 사람과 끊임없이 애착을 맺어가는 만큼 인간에 대한 애착(인류애)이 궁극적으론 중요한 요인이기에, 이 지점에서 '힐링 컨텍스트(치유 환경)'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회견에 참석한 전문가들도 이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저마다 언론사를 비롯한 언론계 조직의 변화를 촉구했다.
KBS 보도본부 전담 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는 하나심리상담센터 문일경 소장은 "기자 직군을 만났을 때 고연차로 올라갈수록 감정이 메마르고 눈에 띄게 피폐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문 소장은 앞으론 언론사에서도 사내 심리건강 진단, 상담 복지 프로그램 등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고려대 미디어학부 박재영 교수는 불필요한 속보 경쟁과 그에 따른 현장 피해자의 코멘트 요구 등을 지적하며 "취재의 제1원칙은 관찰이라면서 이 원칙만 제대로 지켜도 기자와 피해 시민 모두의 트라우마 경험을 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어 "기자들에 대한 교육과 성장은 동료 집단 안에서의 교류가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에 향후 가이드북을 각 언론사 내부 조직이 더욱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어떻게 전파하고 교육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와 관련해 이정애 위원장은 "언론사 데스크들이 더 관심을 갖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위원회 차원에서 더욱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