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기 배우, 연기 집념으로 암 완치의 길 열다
[김용의 헬스앤]
유명인의 투병 소식이 전해지면 대중들은 쾌유를 빌면서 해당 질병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한 의사가 사석에서 “가수 윤종신 덕분에 크론병이 많이 알려져 환자들의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크론병은 소화기관에서 생기는 만성 염증성 장 질환이다. 병명을 어려워하던 사람도 과거 윤종신이 방송에서 “크론병을 앓고 있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면 고개를 끄덕인다. 유명인의 병이 알려지면 일부 대중에게 ‘예방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해당 질병을 검색하며 예방-치료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안성기(71) 배우가 최근 혈액암 투병으로 관심을 모았다. 그는 언론 인터뷰 때마다 “이제 건강을 거의 회복했다”고 말한다. 병원의 혈액 검사 등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고 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1957년 아역 배우로 데뷔해 출연작이 170편이나 되는 그는 영원한 현역 배우를 꿈꾸고 있다. 빨리 암에서 벗어나 그리운 촬영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는 암 발병 전에도 꾸준히 운동을 하는 등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그런 그에게 2020년 10월 암이 찾아왔다. 헬스클럽에서 운동 후 사우나에 들어가다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다. 혈액암 진단이 나왔다. 혈액암은 발생 원인이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아 예방법도 따로 없다. 위암, 대장암은 내시경으로 예방-조기 발견이 가능하지만 혈액암은 특별한 조기 발견법도 없다. 그는 “가족력에 없는 병을 만나 충격이 더 컸다”고 했다.
안성기 배우는 한 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영화계의 신사다. 암 발병 당시 촬영 중이던 ‘카시오페아’ ‘한산: 용의 출현’ ‘탄생’ 등은 치료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출연했다. 감독, 제작자와의 약속일 뿐 아니라 수많은 동료 배우, 스태프와의 신뢰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도중에 배우가 바뀌면 극의 흐름에 막대한 지장을 준다는 판단이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도 영화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었다.
지난해 여름 영화 ‘한산’이 개봉될 당시 그는 병원에서 독한 항암 치료를 견뎌야 했다. 메스꺼움과 구역으로 고통이 극심할 때였다. 식사도 거의 못했고 어지럼증으로 병상에 누워만 있어야 했다. ‘한산’ 시사회는 물론 주요 극장을 순회하는 홍보 활동에도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항암 치료의 고통보다 마음이 더 괴로웠다고 했다. 영화 홍보까지 마무리해 주는 게 배우의 의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19일 서울대 문리대 총동창회가 수여하는 제4회 ‘4·19 민주평화상’을 수상했다. 역대 수상자엔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도 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저는 다섯 살부터 활동해온 영화배우”라며 “4.19 혁명정신을 기리며 제정된 4.19 민주평화상은 너무 과분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랑스러움과 함께 송구스럽기도 한 특별한 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상을 배우 자격으로 받은 게 아니다.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서 지난 30년 동안 해온 구호·봉사 활동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암 치료를 맡아 준 서울성모병원에 1억원을 기부했다. 위기를 넘기고 보니 주변 환자들이 친구처럼 다가왔고 치료비를 걱정하는 일부 환자들에게 작은 정성을 보태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암 투병을 통해 삶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다고 한다. 어려움을 겪어 봐야 어려운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암을 이겨낸다면 이 시련도 자산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일상이 멈추고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아픈 사람들 틈에서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무엇인가에 간절해지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통계를 보면 주위의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는 시대다. 지난해 12월 발표 질병관리청의 암 발생 통계(2020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이 기대수명인 83.5세까지 생존할 경우 암에 걸릴 확률은 36.9%였다. 멀리만 보였던 암이 가깝게 다가온 것이다. 암 환자의 5년 상대생존율은 71.5%로, 환자 10명 중 7명은 5년 넘게 생존한다. 10년 전보다 6.0% 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치료 중이거나 완치된 암 유병자는 228만 명에 이른다. 암도 이제 평생 관리해야 하는 만성질환이 되고 있다는 논문도 나오고 있다.
나는 이 글의 서두부터 ‘안성기 배우’라고 쓰고 있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은 현직을 떠나더라도 장관, 의원 타이틀을 이름 뒤에 붙여주는 경향이 있다. 다섯 살 때부터 연기를 해온 그는 ‘배우’라는 직업에 강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 영화계에서 원만한 성품과 진정성으로 선후배의 신망을 받고 있다. 조금만 유명해져도 음주 운전 등 사고를 치는 일부 배우들과 달리 지금껏 불미스런 일로 오르내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모범 배우’의 전형인 것이다.
암의 완치는 치료 후 5년 이상 생존해야 판정이 내려진다. 안성기 배우의 암 극복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평소의 바른 생활처럼 암을 잘 관리해서 암 극복의 전형이 되어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것 외에 생활습관도 조심해야 한다.
배우 생활도 90세 현역인 이순재 배우처럼 길게 봐야 한다. 조급하게 작품 욕심을 내지 말고 당분간 여유를 갖고 건강에 부담이 없는 연기를 해야 한다. 그는 비교적 빠르게 회복해 이미 수많은 환자들에게 병 완치의 의지를 심어줬다. 연기를 다시 해야 한다는 집념이 도움이 됐을 것이다. 안성기 배우가 암을 완전히 이기고 촬영장에서 환한 미소를 짓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