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환자가 서로 믿지 않으면?
[김영훈의 참의사 찐병원] 의사와 환자의 신뢰
‘주여, 때가 왔습니다’라는 구절로 유명한 시 ‘가을날(Herbsttag)’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대표적 작품으로 널리 애송되고 있다. 그는 평생 장편을 딱 한편 썼다. 바로 《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다.
주인공인 시인 말테가 파리에 머물면서 느끼고 겪은 일들을 수기식으로 적었다. 내용이 대체로 어둡고 서술이 탐미적이라 읽기가 쉽지 않다. 병원 묘사도 종종 등장하는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병원에서는 모두 기꺼이 의사와 간호사에게 감사하면서 죽어간다. 병원에는 그 시설에 대응된 한결같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몸이 아픈 말테에게 병원과 의사가 좋게 보일 리는 없었을 것이다.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스 카로사는 의사의 삶을 살다가 시집을 내고 소설가로 활동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의 장편 《의사 기온(Der Arzt Gion)》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신은 대체 의사란 어떤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소? 궁극적으로는 예술가와 마찬가지 존재야. 의사는 예술가처럼 영감의 순간을 갖거나 자기의 대상을 선택할 수는 없어요. (……) 환자의 수는 걱정이 될 만큼 줄어들었어. (……) 그러나 이번에 온 환자들은 구원을 바라는 진짜 환자들이었지. 욕심많은 요설(妖說)로 의사를 지치게 하고, 자기들 피의 동요까지도 알리려고 하는 ‘환자 아닌 환자’들은 아니었어.”
카로사는 의사였기에, 소설 속에서 기온이 한 말은 그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환자 아닌 환자’들, 속칭 ‘나이롱 환자’들이 그를 괴롭게 한 모양이다.
한 명의 작가는 병원을 탓하고, 한 명의 작가는 환자들을 탓한다. 자기 위치에 따라 –너무도 당연하게- 시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의사 셰이머스 오마호니가 집필한 《병든 의료(Can Medicine Be Cured?)》(2022년)에는 소설 《점심 이후 최고의 약진(The Greatest Breakthrough since Lunchtime)》(1977년)이라는 책이 소개돼 있다.
역시 의사가 쓴 소설로 표지에는 ‘게으름, 난잡함, 음주, 권태, 간통 그리고 의학 연구를 말하는 소설’이라는 광고 문구가 붙어 있다. 저자가 접한 의료세계를 부정적으로 파헤친 소설로 보인다.
의사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나 있으리라 생각한다. 거꾸로도 가능할 것이다. 만일 환자가 의사나 병원을 탓하고, 의사가 환자를 비난하면 누구의 말이 맞을까?
우리나라에선 옛날에 의사나 병원에 대한 기대심리가 낮아서 치료가 안돼도 큰 불만이 없었고, 치료가 되면 감사해 하는 환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평균적 의료 수준도 많이 올라갔고, 환자의 기대심리는 더 올라간 듯하다. 환자나 보호자는 의사가 대부분의 병을 정확히 진단해서 치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기대에 못미치면 법을 찾는다. 주변에서 소송을 부추기기도 한다. 의사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방어적 진료를 한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처럼 자신의 진료철학에 따라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의사가 줄면 결국 환자에게 피해가 갈 것이다.
의사와 환자의 긍정적 신뢰 관계가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둘의 신뢰관계가 좋아질까?
사회 전체에서 불신의 경향이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 의사와 환자의 신뢰도를 높인다는 것이 난제임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방법을 찾기 위한 첫발부터 떼야 할 것이다. 의사에게 열정만, 환자에게 이해만 강요해서는 신뢰 관계가 좋아질 수 없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