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부족하니 의대 설립?...교수도 없는데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28)의대 설립의 조건
1950년대 의과대학은 서울 5개와 경북, 전남, 부산 각 1개로 총 8개였다. 1965년부터 3년 동안 4개가 신설됐으며 1970년대에 7개가 추가됐다. 1980년대에 12개가 새로 출범해 모두 31개가 됐다. 1990년대에는 10개 대학이 신설돼 의대가 총 41개다. 이후 현재까지 신설 의과대학은 없다.
제4차 5개년 계획이 시작한 1977년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목표가 실현됐고 그 해 1월 의료보호사업, 7월 당연적용 의료보험이 시작했다. 의료수요가 늘어날 것이기에 의료기관의 확충과 의료인력 양성이 당연시됐다. 전문적 판단에 따른 전체 청사진과 무관하게 의대가 마구잡이로 여기저기에 설립됐다. 병원이 몸집을 키우면서 의과대학을 설립하면 보다 잘 운영될 것이라는 통념이 바탕에 깔린 측면이 크다.
의과대학을 신설할 재정이 충분하다면 건물을 짓고, 기자재를 사서 의대를 설립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런데 의대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교수 요원이 확보돼야 한다. 교수 요원과 관련 인력을 확보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대학교수는 교육과 연구가 기본인데, 임상교수는 여기에다가 진료도 해야한다.
교수는 일반 개원의보다 임상 경륜도 많아야 하고 연구, 교육 실적도 쌓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의대생 때부터 선교사들과 미국에서 수련받은 교수들에게서 교육을 받고 학술지를 읽으며 ‘의대 교수는 전문분야에서 충실하게 경험하며 경력을 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의대 신설에 따른 여러 문제들이 불거져 나왔다. 신설 의대생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실습을 할 수 있는 시설도 부족했다. 지방 의대생들이 서울 의대 부근에서 하숙하며 단체로 실습받는 현실이 신문에 잇따라 보도됐다. 이런 실정인데도 일부 병원 설립자들은 의대 설립을 주장하고 지역 정치인들이 부화뇌동하곤 했다. 필자는 1994년 봄 대한의사협회 학술이사가 되면서 의대 신설을 반대하는 주무이사 역할을 맡았다.
연세대 교수 출신이었던 안병영 교육부 장관을 찾아가 의대 신설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더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교육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아서 의대 학장 출신의 이순형 서울대 의대 교수, 김일순 연세대 의대 교수와 함께 ‘의대 설립의 합리적 결정을 위한 준칙주의 도입 방안(교육부, 1997)’을 제시했다.
신설 의대의 학과 주임교수는 전문의 과정을 마친 뒤 최소 5년 교수직에 있었던 사람 중에서 발령받을 수 있도록 제안했다. 필자는 1996년 10월 청와대 교육담당 수석비서관을 방문해 의대 인정평가제도의 도입을 건의했다. 또 유성희 의협 회장에게 의사협회, 병원협회, 의학회, 학장협의회, 의학교육학회 등 10개 관련 기관을 참여시켜 한국의학교육협의회(의교협)를 조직해 기존 의대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면서 ‘묻지마 의대 신설’을 반대하도록 제안했다.
1996년 봄 의교협이 구성됐고 학술이사가 당연직 간사를 맡도록 하여 필자가 초대 간사를 맡았다. 필자는 의교협에서 의대 인정평가 사업을 할 것을 제안했다. 대부분 위원들은 원칙에 찬성했지만 민간사업이어서 성과가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필자는 ‘방향이 옳으므로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마침내 1997년 12월 의대평가위원회를 구성했고, 평가를 시작했다.
2002년 말 의학교육평가원(의교평) 설립(안)을 보건복지부에 승인 요청하였는데 퇴짜를 맞았다. 그런데 의학교육 평가업무에 대해 논의한 것들을 정리한 간호협회가 간호교육평가원 설립을 준비했는데, 간호사인 김화중 장관이 부임하자 2003년에 법인 설립 인가를 받았다. 그 해 5월 의학신보사 이웅 사장이 평론가 6명을 초청해 김 장관과 오찬 모임을 가졌는데, 필자가 의교평 설립이 숭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더니 장관은 당연히 승인해야 한다고 했다. 2003년 11월 의교평 설립 총회를 하고, 2004년 2월에 법인 설립이 승인됐다.
의교협과 의교평 등의 노력으로 1997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의대 설립은 없었다. 몇 년 전부터 여러 곳에서 의과대학 신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번에는 ‘공공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왔다.
의대 신설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의교협에서 1999년에 서남대 의대를 펑가했는데, 전문대학 수준도 되지 못하는 시설이었고, 교수 경력이 충분한 교수도 볼 수 없었다. 이곳에서 책으로만 공부한 학생들이 의사 시험을 통과해서 환자를 진료한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기존 대학교도 폐교를 준비하는 때다. 의대 졸업생들이 대학에 남기보다 ‘워라벨’을 찾아 개원하려는 바람이 거센 때에 의대마다 교수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 조감도 없는 무분별한 의대 설립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문제를 제기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것이 옳을까? 인기는 없을지 몰라도 국민 생명을 위해 의대를 신설하려면 필요한 사항을 골고루 갖춰야 설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의사인력이 부족하다면 의과대학을 신설할 것이 아니라 교수가 충분하고 교육환경이 갖춰진 기존 의대의 정원을 필요한 만큼 증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