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의사를 도와주는 선생님?

[김영훈의 참의사 찐병원]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의사는 전문가이지만 예언가는 아니다. 얼굴을 쓱 보고 그 사람의 지나온 날들을 알아맞히지 못하며 미래의 길흉화복도 점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면 EMR(Electronic Medical Record, 전자 의료 기록)에 입력하면서도 그 말을 100% 믿지 않는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보고, 진단해 봐야 알기 때문이다. 의사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미리 앞서서 말하지도 않는 것이 좋다.

의사는 탐구자 정신을 지녀야 한다. 기술이 발달하고, 장비가 초현대적으로 만들어지고, AI와 로봇이 시술을 진행한다 해도 최종 판단은 의사가 한다. 인간보다 뛰어난 로봇이 ‘회생 불가’ 판단을 내렸어도 그 옆에서 환자를 살펴보면서 고민해야 한다. 환자를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해결책이 나오기도 한다. 완치된 환자가 의사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겨 줄 때도 있다.

2002년, 미국과 유럽의 대형 병원들에는 ‘부정맥 진단 3차원 영상 판독기’가 설치돼 있었다. 나는 이 판독기를 구매해 달라고 모교 병원 원장님에게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그러자 원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대병원에도 없고, ○○병원에도 없고……. 아시아에는 한 대도 없네. 너무 고가의 장비라서 그렇지.”

그전에 동일하이빌의 고재일 회장이 부정맥으로 안암병원에서 나의 치료를 받았다. 완치된 그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3차원 부정맥 영상 판독기가 있어야 하는데 없어서 아쉽다고 말했다. 고 회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나에게 거액을 송금해 주었다. 나뿐만 아니라 원장님을 비롯해 병원 직원들 모두 깜짝 놀랐다. 당시로서는 매우 큰 돈이었다. 기탁 조건은 ‘부정맥 진단 3차원 영상 판독기’ 구매였다.

미국 ESI(Endocardial Solutions Inc)사의 3차원 영상 판독기를 아시아에서 최초로 설치했다. 설치와 함께 고 회장의 전적인 도움으로 심혈관 센터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할 수 있었다. 고 회장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고대 안암병원이 부정맥 진단과 시술에서 명품 병원이 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고 회장님 이외에도 꼭 필요할 때 부정맥 연구기금을 주신 조중형 웅진 고문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도움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것이다.

의사는 환자와 한 몸이 돼야 한다. 환자는 의사에게 도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사를 도와주는 역할도 한다. 환자가 물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환자의 말 한마디나 증세가 의사의 나침반이 될 경우가 적지 않다. 의사는 환자 없이는 살 수도, 발전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환자가 더 많을수록 더 밀접하게 지내야 하며 매의 눈으로 환자를 살펴야 한다. 이는 현재나 미래나 마찬가지다. ‘솔’과 ‘미’를 잘못 쳤는지 구분하려면 10만 시간 넘게 피아노를 쳐야 할 것이다. 전문가는 그 수준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탐구 정신으로 환자를 대하면 불치병이 차츰 줄어들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사의 내공과 보람도 올라갈 것으로 믿는다. 환자는 의사의 스승이자 교과서이다. 이를 깨치는 게 좋은 의사의 첫 조건이라는 점, 결코 지나친 주장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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