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 37도는 건강의 절대 잣대일까?
[김영훈의 참의사 찐병원] 체온의 의미와 측정방법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평상시 같으면 1년에 한두 번 잴까 말까 한 체온을 매일 반강제적으로 재야 했다. 어디든 들어가려고 하면 열을 재야했고, 조금이라도 높으면 입장이 불허됐다. 체온이 높다고 해서 ‘혹시 내가 코로나에 걸렸나?’ 하는 불안감이 찾아드는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 상황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전쟁 영화에는 꼭 총을 들고 전투를 벌이는 용감한 보병들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통신병이 등장하고, 보급병도 등장하고, 위생병도 거의 반드시 등장한다. 빨간색 십자 군장을 멘 위생병은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닌다. 나아가 야전병원은 지휘소만큼이나 중요하다.
그곳에는 초록색 군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흰 가운을 입은 군의관이 있고,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간호장교도 있다. 그녀는 다친 병사들에게 천사로 여겨진다. 간혹 영화 속에서는 간호 장교와 병사의 매력적 혹은 눈물겨운 러브스토리가 펼쳐지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관객을 사로잡기 위한 양념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야전 병원은 대부분 군용 천막이고, 쇠로 만든 접이식 야전 침대가 2열로 놓여 있다. 나무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의약품 몇개가 진열돼 있었다. 카메라가 하늘로 올라가 아래를 비추면 천막 위에 커다랗게 새겨진 빨간 십자 마크가 선명하게 보인다. 병원이므로 폭탄을 떨어뜨리지 말라는 당부이지만 적의 폭격기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병원은 어느 곳에든 있다. 포로수용소에도 있고, 감옥에도 있고, 항공모함에도 있다. 유대인들을 절멸시켰던 비극의 아우슈비츠에도 병원은 있었으며, 당연히 청진기를 목에 두른 의사가 근무했다. 자국민을 가두어 놓은 죄수 수용소에도 병원은 필수 시설이었다.
1951년 1월의 어느 날, 아침 5시 정각,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기상신호가 울리자 잠에서 깨어난다. 추위가 엄습해 온다. 그가 갇힌 곳은 시베리아의 한 굴라크(Gulag: 소련의 강제 노동 수용소)이기 때문이다. 극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온종일 노동해야 하는 슈호프는 오늘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의무실에 찾아간다. 의사는 없고 조수 니콜라이 브도부쉬킨만이 있을 뿐이다. 그 역시 죄수임에도 “수습 의사 경력이 있다”고 주장해 의무실 조수가 되었다. 의사 면허증도 없고, 의과대학에 다녔다는 증명서도 없지만, 수용소 측은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편한 직책을 준 것이다. 슈호프는 브도부쉬킨에게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쑤시고 아프다’고 하소연한다.
수용소에 갇힌 죄수 중에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브도부쉬킨은 그런 그를 타박하지 않고 진찰이라는 것을 시작한다. 곧바로 체온을 잰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전체주의 국가 소련의 억압 상황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소설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는 사실 솔제니친 그 자신이다. 소설에는 시베리아의 굴라크에 8년 동안 갇혀 노동했던 체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브도부쉬킨은 슈호프의 체온을 측정하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슈호프의 체온이 37.2도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수치가 매우 어정쩡하다고 혼잣말을 한다.
사람의 체온은 통상 36.2~37.5도가 정상이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면 몸에 이상이 있음을 나타낸다. 안타깝게도 슈호프의 체온은 이 기준 안에 들어온 37.2도였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는 존재이지만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프다’라는 말은 엄살이 돼버렸다.
브도부쉬킨은 처방을 내린다. 38도만 되어도 작업 면제를 시킬 수 있지만 37.2도이기 때문에 작업 면제를 시켜 주지 않는다. 슈호프가 작업을 면제받기 위해 꾀병을 부렸는지, 조수 브도부쉬킨이 의사(혹은 조수)로서 책임을 회피했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의학적 소견에 따라 정상 체온의 범위에 있었기에 슈호프를 작업장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브도부쉬킨이 놓친 것이 있다. 의학적 방법으로 체온을 재는 방법은 4가지이다. 입, 항문, 겨드랑이, 귀(고막)이다. 지금 20세 이상의 사람은 대개 기억하고 있겠지만 과거에는 체온계를 보통 입이나 겨드랑이에 넣고 2~3분 지난 다음에 꺼내서 그 눈금을 쟀다. 아기들은 주로 항문을 이용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체온계가 나와 체온을 재는 방법은 5가지로 늘어났으며, 재래식 방법은 대부분 사라졌다.
4가지 방법으로 체온을 재면 눈금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소설 속에서는 아마 체온계를 입에 넣었을 것이다. 만약 다른 3가지 방법으로 체온을 쟀다면 슈호프는 그날 노동을 면제받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37.2도라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태다. 그것을 몰랐다면 ‘수습 의사 경력이 있다’라는 브도부쉬킨의 주장은 거짓이라는 뜻이다. 아니면 그냥 귀찮아서 슈호프를 작업장으로 내보냈거나.
그때에서 72년이 흐른 2023년 지금, 어떤 사람의 체온이 37.2도였다면 의사는 어떤 진단을 내릴까?
우선, 세계 곳곳에서 평균 체온이 떨어지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잇따르고 있다. 150년 전 독일 의사의 측정결과 정상체온이 37도로 나왔고 이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왔지만 1992년 36.8도, 2017년 36.6도라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2020년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1800년대 이후 미국인의 체온이 10년마다 0.03도씩 떨어져 200년 동안 평균 체온이 0.59도 떨어졌다”는 코호트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라는 표현과 달리 체온 측정 후 발열자를 ‘유열자’로 표현하였다. 체온 몇 도 이상을 유열자로 규정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인간의 체온은 건강 이상 유무를 판단하는 불변의 법칙일까?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수용소와 난민 캠프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부상과 질병, 피로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의료환경이 열악한 곳에서는 70여 년 전과 똑같이 체온계 하나만으로 건강 이상 유무를 판정 짓고 있지는 않을까? 과연 30년 뒤 또는 50년 뒤에도 체온이 건강의 첫 잣대로 기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