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따지는 사이, 환자는 죽을 수도 있는데…

[김영훈의 참의사 찐병원] 검증과 규제의 딜레마

기기와 약에 대한 허가 절차가 복잡하고 길어지면 환자, 가족과 의사는 애간장이 타들어간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2002년 고려대안암병원에 아시아 최초로 3차원 심장 영상판독기가 설치됐고 이에 따라 부정맥의 정밀한 치료가 가능해졌다. 운이 좋았는지 당시 의료기기에 대해 엄격한 검증 절차가 없어서  병원에서 활용방법을 익혀 곧바로 임상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부정맥 치료에 일대 전환을 가져 왔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20여 명이 직접 나와 시술하는 실제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아시아에서 처음 설치된 기계여서 다른 병원이나 나라에서 의료인들이 탐방을 많이 왔다. 홍콩, 싱가포르, 타이완, 일본 등 숱한 나라의 의사들이 찾아왔고, 병원은 아시아의 부정맥 전문 의사들이 서로 정보를 교류하는 곳이 됐다.

필자는 그들을 대상으로 사용방법, 효과 등을 알리는 실습과 강연을 겸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첫 프로그램이 끝나자 뜻밖에도 미국 A사에서 내게 강연료를 냈다. 그 돈은 병원 직원 3, 4명과 저녁을 먹으면 없어지는 금액이었다.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강의에 공식 성격을 부여하는 상징이었다. 강사에게 돈을 주지 않고 강연 프로그램을 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진행하던 때 그 회사가 갑자기 프로그램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연락을 했다.

“한국 국회에서 통과시킨 ‘김영란법’ 때문에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과 이것이 무슨 상관인가요?”
“적절한 강연료를 주는 것은 법에 어긋납니다.”

A사는 프로그램을 중국 베이징으로 옮겨버렸다. 강의료를 안 받겠다고 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김영란법의 유탄을 맞은 것이다. 해외에서 오는 의료진들에게 한국 의술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관광 수입도 올릴 수 있는 두 마리 토끼가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린 셈이었다.

부정청탁을 금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 의외의 부정적 결과를 낳은 것 같아 아쉬웠다. 김영란법은 뜻은 좋지만, 일반인이 알 수도 없는 많은 역효과를 냈다. 취지는 옳지만 의외의 부작용을 내는 법과 제도는 많으며 새 의료기기 평가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료기기가 의료 선진국에서 개발돼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해 승인받고 임상에서 사용되고 있다면, 우리도 그 기기를 수입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지정된 의료기관 여러 곳에서 일정 기간 테스트한 뒤 부작용이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승인하면 될 것이다.

특히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까다로운 다민족 임상을 거쳐 허가를 내는데, 우리나라에선 왜 원점에서 다시 허가 절차를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다. 꼭 필요한 절차라면,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고 속도를 내줄 수는 없을까?

의료계 밖의 사람들은 뭐 그런 게 몇 개월씩이나 걸리느냐고 의아해한다. 의료인에게는 몇 개월만에 허가가 난다면 무척 짧은 시간이다. 까다로운 절차와 복잡한 규제로 1년은 기본이고 3, 4년이 걸리기도 한다. 물론 규제당국이 기기와 약에 대한 신속심사제도를 도입하고는 있지만, 그 절차가 신속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문제다.

그 사이에 이런 의료기기나 치료제의 혜택을 못 본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면 엄격한 심사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많은 환자와 가족이 애간장을 태우거나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치료’를 기다리고 있으며, 숱한 의사들이 그들을 돕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질병은 일종의 카오스다. 혼돈의 상태로 만든다. 그 무질서를 주의 깊고 꾸준히 연구하면 어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질병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 무질서 속의 질서와 규칙을 규명하는 것은 ‘의사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사와 의료인, 의료행위와 기술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규제를 철폐하는 과제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불치병의 숫자를 줄여나갈 수 있고, 의료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건강한 미래 한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환자나 가족이 눈물 흘리거나 탄식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김영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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