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100일] 재난의 아픔, 사회가 품자

[닥터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 [사진·그래픽=최지혜 PD]
2022년 10월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국내 최악의 압사 참사가 발생한 지 100일이 지났다. 지난 100일 동안 159명이 희생됐다. 사고 1개월여 만에 세상을 등진 1명의 희생자를 포함해 경찰과 공무원 등 총 3명이 참사와 관련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국회에선 55일간의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를 진행했지만, 참사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두고 속 시원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상처는 여전히 벌어진 채 시간만 흘러간 셈이다. 누구도 매듭을 묶지 않은 탓에 분열은 더욱 커졌다. 결국 분향소 설치를 둘러싸고 날선 말들이 또다시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이번 참사에서 재난 트라우마 의료활동에 앞장 선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는 참사 희생자에 대한 비난은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갉아먹는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키울뿐이라는 설명이다. 백 교수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더욱 성숙해지기 위해서라도 재난과 참사의 아픔을 사회가 품자"라고 제안했다.

◆ "치유도, 신뢰도 '희생의 기억'에서부터"


재난은 개인이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사건을 일컫는다. 자연적인 천재지변은 물론, 사회적으로 영향이 큰 전염병과 인적 사고도 재난에 포함한다. 이러한 사고의 영향이 국가적으로 광범위 영향을 미치는 대형 규모의 재난일 경우엔 특별히 '사회적 재난(참사)'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신건강의학계는 사회적 재난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거대한 참사 앞에서 전 국민이 '정신적인 상처(트라우마)'를 입는 현상을 우리 사회가 이미 여러 차례나 겪어왔기 때문이다.

최근의 이태원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참사라는 '비극적 재난' 이후 우리 사회가 겪는 국민적 슬픔과 사회적 논란 역시 트라우마의 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백 교수는 이와 같은 상황을 우리 사회가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종의 성장통'으로 해석했다.

"사회가 재난에 대응하는 방식이란 한 사회가 겪는 발달의 과정인 것도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빨리 산업화해야 하고 성장이란 가치가 중요했던 과거에는 재난의 피해와 괴로움은 결국 개인과 가족의 몫이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또 (성장을 위해) 달려가야 했으니까요.

이제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고 유엔(UN)이 인정한 선진국에 진입하는 이런 시점이 되면 대개 다른 국가들에서도 사회적으로 재난에 대한 대응 방법이 성숙하기 시작하고 사회의 역할도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백 교수는 이와 관련해 미국 뉴욕시의 '911 메모리얼 박물관'을 예로 들었다. 2000년 911테러 희생자를 기리는 박물관은 모든 소재 하나하나가 당시 참사와 희생자들을 상징하고 기념하도록 설계됐다. 입구에선 로마의 시성인 베르길리우스(Virgil)를 인용한 '시간의 흐름 속 단 한 순간도 당신의 기억을 지울 수 없다'(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는 문구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미국 뉴욕시 911 메모리얼 박물관 입구에 인용된 베르길리우스의 문구. '시간의 흐름 속 단 한 순간도 당신의 기억을 지울 수 없다.'(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사진=911 메모리얼 박물관]

"911 메모리얼 박물관에서 '재난을 극복하는 일'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선진국이라고 재난이 아예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구나' 하구요. 그런 일을 다시 겪지 않을 시스템을 만들고, 또 거기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됐습니다.

(상처의) 회복에 있어서 '의미 부여'는 정말 중요하거든요. 이를 계기로 우리가 (참사를) 잊지 않고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주고 공동체를 회복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동체를 복구해야 정신과 의사들이 할 일이 없어집니다. 이걸 거꾸로 하게 된다면, 오히려 정신과 의사들이 할 일은 많아지는 데도 정작 (사회는) 치료에서도, 치유에서도 멀어지겠죠. 지금이 그런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가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8년' 동안 준비한 참사 대응... 그래도 "이제 시작"


이번 이태원 참사 대응 역시 과거의 재난과 그 트라우마를 극복한 하나의 사례일 수 있다. 특히나 정신건강의학계가 발 빠르게 '사회적 패닉'을 예방한 과정은 사실상 8년을 준비해온 결과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계가 '재난 트라우마'라는 분야를 연구하기 시작한 시점이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당시 자신을 비롯한 많은 동료 의사들이 세월호 참사로 발생한 셀 수 없이 많은 트라우마 환자들의 괴로움을 목격하며 정신과 의사로서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이런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안에선 뜻을 나눈 동료들이 하나둘씩 모였습니다. 그때는 밤에 자고 일어나면 거짓말같이 책 한 권이 뚝딱 번역됐어요. 동료들 모두 '어떻게든 무엇인가 해보자'는 마음이 너무나도 절실했던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저희들도 서로 위로를 받고 (트라우마 회복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처음 시작했던 재난 트라우마 대응 체계는 지난 8년 동안 많은 일들을 겪고 배우면서 '국가트라우마센터'도 설립하게 됐고 이젠 그래도 이전보다는 초기 대응이나 방향의 측면에서 상당히 나아진 것 같습니다."

지난해 11월 12일 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회가 개최한 이태원 참사 긴급 워크숍 모습. 지난해 말 본지는 8년 동안의 재난 트라우마 연구와 이태원 참사 대응 관련 노력을 대중에 알리고자 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회를 '2022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앞줄 왼쪽부터 강남세브란스병원 석정호 교수, 서울성모병원 채정호 교수, 경희대병원 백종우 교수(위원장), 강북삼성병원 오강섭 교수(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 경희대병원 백명재 교수. [사진=서울아산병원 정찬승 외래교수·마음드림의원 홈페이지]
백 교수는 이태원 참사 대응이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참사 유족과 생존자들의 고통이 여전히 실존할 뿐 아니라, 현장 대응 관계자들이 겪었거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트라우마 피해는 오랫동안 수면 아래 묻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이태원 참사 직후 한 인터뷰에서 향후 1만 명 이상이 재난 트라우마의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번 참사는 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해 직접 경험한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유형의 재난이었지만, 저는 오히려 우리 국민들의 성숙한 대응과 반응에 더욱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동안의 연구에서 알게 된 교훈은 마음과 뇌에도 상처를 남기는 트라우마가 발생했을 때 빠르고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같은 후유증과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사 초기 많은 분들이 이를 위해 노력해준 덕분에 이제 일반 국민은 재난 트라우마를 많이 회복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결과는 '현재 진행형'이기에 저희는 계속 노력해야겠습니다. 유가족이나 현장의 목격자분들, 구조 인력과 같은 경우는 오히려 사건 발생 이후의 기간이 더욱 중요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비롯해 사회적인 비난 등으로 제대로 정신적 도움을 받지 못하시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저희가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백 교수는 참사 이튿날 당시와 동일한 부탁을 다시금 당부했다. 여전히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참사 희생자와 유족, 생존자 등에 대한 혐오발언과 비난과 같은 2차 가해를 삼가달라는 것이다.

"재난 트라우마로 인한 최악의 결과 중 하나는 자살입니다. 정신건강과 관련한 그 모든 노력은 그런 결말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시기엔 무엇보다 참사와 피해자의 극단적인 선택 등으로 영향을 받을 유가족분들과 그 주변, 또한 위기에 처한 분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지 더 적극적으로 얘기할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유가족분들이 '피해자와 유족을 탓하는 비난의 댓글을 보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언론에서 얘기하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이전에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뿐 아니라 천안함이나 제1연평해전 생존장병들 모두 굉장히 오랫동안 공들여 왔던 치유의 노력이 악플 하나에 무너지는 일들을 종종 봐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얘기하시기도 합니다. '거기에 왜 내 세금을 쓰냐?', '이게 왜 나라 책임이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도 봅니다. 애도는 각자의 방식으로 하는 것이고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말을 표현하고 댓글로 적는 순간, 오히려 본인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더 많은 세금이 들어가게 됩니다. 악플의 폭력적인 영향으로 더 많은 분들이 후유증을 앓게 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지금 그런 행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 [사진·그래픽=최지혜 PD]


댓글에서 참사 피해자와 유족, 당일 이태원 방문 시민 등을 향한 비난과 공격적인 표현을 자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사 내용에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만,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그리고 한 분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겨냥하지 않더라도 온라인상의 거친 표현이 참사의 상처를 더욱 괴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분들이 상처를 받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독자분들께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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