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줄 없이 첫 호흡하는 그 순간처럼

첫 수술 (금상)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병원은 여러분에게 어떤 곳인가요? 때론 두렵지만, 때론 세상 어느 곳보다 가장 위로를 주는 곳이 되지 않나요? 코메디닷컴은 연말을 맞아 따뜻하고 감동적인 의료현장의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보령의사수필문학상 작품들과 함께 생명과 사람, 그리고 소중한 이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실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흐른다는 걸 느낀다. 산모는 산전 진찰을 위해 만삭까지 매달 병원에 방문한다. 지난 진료가 불과 며칠 전 같아 진료기록을 보면 역시나 한 달이 또 지나가 버렸음을 깨닫는다.

“아니 벌써 한 달이 지났나요? 우리 엊그제 뵌 것 같은 기분인데요.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을까요?”

태아 초음파를 보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산모에게 말하곤 한다. 산모가 깔깔 웃으니 태동이 초음파 기구를 통해 내 손으로 전해진다.

그렇게 한 달씩 야금야금 보내다 보면 40주라는 임신 기간도 금방이다. 작은 심장 박동뿐이었던 태아가 다음 만남 땐 눈사람 모양이 되어 있고, 어느새 팔다리가 생기더니 쑥쑥 자라 세상으로 나온다. 아기를 조심스럽게 내 품으로 받아 산모에게 넘겨주고 나면 나의 시간도 어느새 1년이 지나간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내 시간을 조금씩 나눠주면서도 난 내가 나이 든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분만을 받은 만큼 시간은 빠짐없이 흘렀고, 거울 속 내 모습도 그만큼 주름과 새치가 늘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해가 저물어가는 계절 탓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자주 과거를 추억하곤 한다.

난 어렸을 때부터 겁이 많았다. 친구들은 세발자전거에서 두발자전거로 넘어가 잘만 타는데, 난 보조 바퀴를 단 자전거에서 넘어가지 못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두발자전거를 타보자고 하시면서, 자기는 뒤에서 잡아줄 테니 앞만 보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라고 하셨다. 어머니를 믿을 수 없어 영 불안했던 나는 신신당부를 했다.

“엄마! 정말 손 놓으면 안 돼! ‘꼭’이야! 꼭!”

그렇게 조금 달렸을까. 뭔가 등 뒤가 허전하여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없었다. 놀란 나는 균형을 잃고 넘어져 엉엉 울었다.

제왕절개 수술을 처음으로 ‘혼자’ 집도한 날이었다. 수술을 앞두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머릿속으로 수술 과정을 상상하는데, 어째서인지 두발자전거를 처음 탔던 어린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 묘한 흥분이 등을 타고 올라 심장에서 손끝으로 뿜어지는 것이 한 가닥마다 느껴진다. 그저 삐뚤빼뚤 달리다가 넘어지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자신이 집도의의 첫 수술 환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술대에 누워 떨고 있는 환자의 손을 잡으며 “괜찮아요, 저도 처음이에요.”라고 말하는 의사도 당연히 없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의사도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첫 수술’이라고 해야 할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의사의 수련은 몇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저 작은 처음을 무수히 거치다 보니 선배 의사가 있던 자리에 내가 서 있었다.

실습 학생이었던 24살. 처음 들어가 본 수술실에서 배운 것은 손 씻기와 수술 가운 입기부터였다. 2년이 지나 의사가 되고 나서야 수술 전 환부 소독과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이듬해엔 제3 조수로 수술에 참여하고 해가 가면서 제2 조수, 제1 조수로 이동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조금씩 늘었다. 전문의가 되고 내 환자가 생기자 한동안 지도 교수님께서 ‘제1 조수’ 역할을 하며 수술을 도와주셨다. 그러다가 교수님께서 차츰 손을 떼면서 비로소 독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 겁이 많았다. 사람의 몸엔 정해진 길이 그려져 있지 않다. 산모의 배 피부부터 자궁까지 어떻게 절개하는가는 의사가 판단해서 나아간다. 책과 동영상을 계속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 했지만, 불안과 확신 가운데 있는 길을 내가 찾아간다는 것이 매우 두려웠다. ‘혼자 수술하다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어쩌지?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라는 생각에 교수님께 자꾸만 의지하게 되었다. 언제까지 교수님과 함께 수술할 순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러던 어느 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은 제가 참관만 하겠습니다. 어디 안 가고 등 뒤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수술하세요.”

갑작스러웠으나, 결국 독립할 시기가 왔음을 직감하고 대답했다.

“네! 교수님.”

대답은 일부러 더 씩씩하게 했지만, 뭔가 어릴 적 기억의 어머니와 교수님이 겹쳐 보였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수술실로 갔다. 수술 준비를 마치고 산모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마취가 시작되자 산모는 이내 잠들었다. 마취과 선생님이 산모의 상태를 확인한 후 말했다.

“시작하시면 됩니다.”

“메스.”

연필을 잡고 선을 그리듯 복부를 가른다. 손가락으로 확신의 길을 찾아 훑는다. 복부 한 층 한 층 저마다의 방향으로 문을 열고 도달한 곳은 자궁. 마지막 문을 열고 태아를 꺼낸다. 오늘따라 아기의 울음소리가 우렁차니 좋았다. 일단 목적지까진 무사히 도착했다. 태반을 꺼내고 출혈 확인 후 자궁을 다 꿰매고 난 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은 건 열어놓은 문을 꼼꼼하게 닫는 것뿐이다. 그래도 배를 봉합하기 전 마지막으로 교수님께 확인받고 싶었다.

“교수님. 이 정도면 다 된 것 같은데요. 괜찮은지 한번 봐주실 수… 어라?”

뒤를 돌아보니 교수님은 계시지 않았다. 내가 두리번거리자 수술실 간호사가 말했다.

“교수님은 아까 아기 우는 거 보시곤 슬며시 나가셨어요.”

“아 그래요? 그랬군요….”

수술에 집중하다 보니 교수님께서 몰래 나가신 줄도 몰랐다. 수술방에 있던 다른 이들은 교수님께서 나가시는 걸 봤지만, 아무도 내게 말하지 않았다.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묘한 허전함을 느끼며 묵묵히 수술을 마쳤다.

‘이젠 정말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는구나.’

긴장과 흥분이 가라앉아서 그런지 쓸쓸함마저 느끼며 수술실을 나왔다. 그런데 누군가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님이셨다! 교수님은 혹시라도 수술이 잘못되면 급히 들어가려고 수술실 밖에서 대기하고 계셨던 거였다. 마스크 위로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며 교수님께서 미소를 지으셨다.

“그래. 수술은 잘 끝났나요?”

“네. 교수님 덕분에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다 허 선생이 잘한 거지.”

“아닙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래요…. 이걸로 된 거예요. 수고했어요.”

떠나는 교수님을 붙잡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저 교수님의 등 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을 따라 산부인과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으며 걸어가야 했다. 아기가 태어나기 위해선 결국 탯줄을 끊고 스스로 호흡해야 하는 것처럼. 그건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설레는 느낌이었다.

허지만 (미래아이산부인과의원·산부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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