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 의료보험 조기정착은 세계 모델?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27 사회적 실험 : 대한민국 의료보장
필자는 의대를 졸업하고 예방의학을 전공하면서 의료보장, 의료경제학, 병원경영, 보건의료정책에 관심을 두었다. 1971년 의료선교사가 경남 거제군 하청면에 세운 거제건강원(지역사회개발보건원)의 초기 보건사업을 담당했다. 1972~74년엔 정부/세계보건기구(WHO) 보건개발프로젝트(K-4001)의 상대역(카운터 파트)을 담당하면서 고문관들과 값진 경험을 함께 쌓았다. 1975년 연세대 의대 강화보건사업을 시작하면서 봉화의료보험조합 설립과 운영을 맡아 건강보험이 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또 공군본부 의무과장(76~77년)을 거쳐 1978년부터 미국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여러 저명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여름방학에는 관련 기관에서 실습을 했다. 박사 학위 논문은 우리나라 자료를 수집 분석한 “대한민국 의료보험 가입자와 비가입자의 병원 이용”(81년)이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 티모시 베이커(Timothy D. Baker) 지도교수가 보건경제학 알란 솔킨(Alan L. Sorkin) 교수를 부지도교수로 추천했다. 솔킨 교수가 1976년에 지은 책을 84년 증보 발간했는데 내용이 너무 좋아 필자가 번역해 《의료경제학》(홍성사, 1985년)으로 출판했다. 책의 30%는 개발도상국 내용이었다.
필자는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에도 틈틈이 존스홉킨스 교수들과 소통하면서 활동상을 알리곤 했다. 베이커 교수가 제목을 주면서 1987년 1월 특강을 하도록 요청했는데, 교수들이 다수 참석했다. 베이커 교수가 자택에서 저녁 식사를 마련하였는데, 4명의 교수가 동석하였다.
그 해 말 공문을 받았다. 1988년 1월 강좌 담당 제안 내용이었다. 대학원장. 지도교수, 국제보건학과장, 보건시스템 주임교수 등 4명이 서명한 의뢰서였다. 여럿이 서명한 편지는 평생 처음 받아봤다. 이 강의는 매년 실시되는 정규 강의여서 겨울방학 때마다 강의하러 출국했다.
더구나 존스홉킨스의 교수 발령을 받아 하는 강의였다. 학기 말에 수강생들이 강좌별로 평가를 하며, 그 결과는 도서관에 비치된다. 평가 결과가 수준 이하이면 폐강이 되므로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이 강좌는 2001년까지 매년 개설하여 운영됐다. 그 해 9.11 테러가 발생하였다. 필자는 연세대 보건대학원장 임명을 받았다. 이 강의를 하려면 겨울방학 기간에 근무하지 못하게 돼 부담스러웠다. 존스홉킨스대에 강좌를 중단하겠다고 알렸다.
이 강좌와 더불어 염두에 둘 명제가 있다. 사회적 실험(Social experiment)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적으로 평가할 실험 과제는 한 세대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1977년에 시작해 불과 12년 만에 전 국민 의료보험 시행으로 도약했다.
이는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77년 7월 500인 이상 사업장에 의료보험이 처음 실시된 이후 다양한 실험과 요구가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서 우리나라 경제사회 변화가 뚜렷하였다. 소득 수준이 급등하면서 복지 욕구가 솟구쳤고, 의료보험 확대 요구가 빗발쳤다. 경제, 보건 분야 학자들은 직장 의료보험을 먼저 확대하자고 주장했고, 복지 분야 학자들은 농어촌 주민과 자영자를 보험에 가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도 다양한 실험을 했다. 필자는 지역의료보험 제2차 사업(82년)에 경기 강화군을 포함하도록 보건사회부(보건복지부) 김영기 보험국장과 차흥봉 보험제도과장에게 제안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성공적으로 시행됐다. 경제기획원 문희갑 기획실장이 주관하여 매년 건강보험 세미나를 할 때 필자는 늘 참가했다.
필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1980년대 중반에 경제기획원, 보건복지부 그리고 여당 정치인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하자고 역설했다. 마침내 노태우 대통령 후보자가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하겠다고 1986년에 공약을 내놓았다. 그가 당선되자 1989년에 전 국민 의료보험이 현실화했다.
국가적으로 실시하는 정책이나 사업이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국제적으로 학자들이 성공을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국가 정책 사업이 가족계획사업과 새마을운동이다. 그리고 최단 기간에 시행된 것이 전 국민 의료보험이다.
필자는 전 국민 건강보험의 성과에 대해 존스홉킨스 앤더슨 교수와 함께 논문을 써서 1992년 국제 학술지에 게재했다. 논문 제목은 ‘한국에서 전 국민 건강보험의 달성-다른 개발도상국의 모델’(Achieving universal health insurance in Korea - A model for other developing countries? Health Policy, 199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