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신약 없어도…치매 예방하는 방법은?
시력 난청 등 행동 처방이 더 효율적.. 미국에서 10만 건 예방 가능
세계적 고령화와 더불어 치매 환자는 계속 늘고 있다. 각종 약물을 이용해 치매를 늦추는 시도가 이뤄지는 가운데 시력 개선만으로 미국에서 약 10만 건의 치매 사례를 예방할 수 있다는 연구가 나왔다. 지난달《미국의학협회저널(JAMA) 신경학》에 발표된 미국 연구진의 논문이다. 미국의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토대로 공중보건담당자들 사이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신약 개발보다는 시력악화, 난청, 고혈압, 당뇨병, 운동부족 등 이미 널리 알려진 치매 위험 요인에 대한 행동처방이 더 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 미시간대 의대 조슈아 에를리히 교수(안과)가 이끄는 연구진은 건강 및 은퇴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현재 치매환자의 약 62%가 위험요인 개선을 통해 예방될 수 있으며 1.8%인 약 10만 명은 시력 건강을 통해 예방될 수 있었다고 추정했다. 에를리히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시력 장애와 실명의 80~90%는 조기 발견과 치료를 통해 피할 수 있다”면서 시력 검사, 안경 처방, 백내장 수술처럼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접근하기 쉬운 개입으로 이런 예방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권위 있는 의학학술지 《랜싯》이 구성한 ‘치매 예방, 개입과 관리를 위한 랜싯 위원회’는 2017년부터 치매 위험 요인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의사, 역학자, 공중 보건 전문가로 구성된 패널은 수백여 개의 고품질 연구 검토를 통해 전 세계 치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조정이 가능한 9가지 위험 요인을 선정했다. 고혈압, 낮은 교육 수준, 손상된 청력, 흡연, 비만, 우울증, 신체적 활동 부족, 당뇨병 그리고 낮은 사회적 접촉 수준이었다.
이 위원회는 2020년 3가지 요인을 추가했다. 과도한 알코올 소비, 외상성 뇌 손상 그리고 대기 오염이다. 위원회는 이 12가지 수정가능 요인을 제거한다면 이론적으로 전 세계 치매 사례의 40%가 예방되거나 지연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 위원회 의장인 길 리빙스턴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정신의학)는 “12가지 위험요인만 줄여도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수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며 “사실 부유한 나라에선 더 많이 교육받고 담배를 덜 피우면서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노령화로 인한 치매환자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유럽과 북미에서는 지난 25년 동안 치매 발병률이 10년마다 13%씩 떨어지고 있다.
에를리히 교수는 랜싯 위원회가 보고서를 갱신할 때 조정 가능한 치매 위험 요인에 시력 장애를 추가하기를 바라고 있다. 리빙스턴 의장은 이 문제가 랜싯 위원회의 의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왜 청각과 시력 감퇴가 인지력 저하를 가져올까? 《JAMA 신경학》에 관련 사설을 쓴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의 줄리오 로하스 교수는 “신경계는 감각 기관으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그 기능을 유지한다”며 그 자극이 없다면 “신경세포(뉴런)이 죽어 사라지면서 뇌의 재배열이 일어나게 된다”고 설명했다.
청각과 시력 상실은 또한 노인들의 신체적, 사회적 활동에 대한 참여를 제한함으로써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에를리흐 교수는 “여러분은 카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친구들과 카드놀이도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읽는 것 자체를 중단하게 된다”고 말했다.
랜싯 위원회가 조정 가능한 위험 중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은 난청과 치매 사이의 연관성은 잘 확립돼 있다. 반면 시력저하와 치매의 관련성에 대한 임상 데이터는 적다. 에를리흐 교수는 그러한 데이터 확보 차원에서 인도 남부에서 노인에게 안경을 제공할 경우 인지력 저하가 덜 발생하는지에 대한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교육 수준을 높이는 것과 고혈압을 줄이는 조치는 청소년기나 중년부터 시작돼야 한다.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정책변화가 수반돼야 가능한 요인도 있다. 예를 들어 개인이 공기 오염을 통제하기 어렵다.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이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것처럼 개인적 습관과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혈압을 계속 측정하고 고혈압 약을 복용하는 일상적인 의료 관행도 저소득국 국민에겐 그림의 떡일 수 있다.
그럼에도 치매에 대한 조정 가능한 위험 요인을 줄이는 것은 엄청난 보상을 줄 수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도 알츠하이머병 해결을 위한 국가 계획에 이미 그러한 접근법을 포함시켰다.
이러한 위험 요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노령층과 그들의 가족을 안심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치매에 대한 몇몇 중요한 위험요인, 유전과 가족력 그리고 나이를 먹는 것 자체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다. 그러나 조정 가능한 요인은 우리의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리빙스턴 의장은 “사람들은 치매에 걸리고, 기억력, 성격, 독립성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강력한 동인이 된다”고 말했다. 심지어 발병을 지연시키는 것만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리빙스턴 의장은 “치매가 80세에 발생하는 것과 90세에 발생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라고 지적했다.
에를리히 교수는 “우리가 말하는 것은 값비싼 치료약이나 환상적인 수술, 전문의의 원격진료 같은 게 아니다”고 말했다. “시력과 청력 검사, 운동, 체중 조절, 금연, 혈압약, 당뇨병 치료, 이는 어느 사회에서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해당 논문은 다음 링크(https://pubmed.ncbi.nlm.nih.gov/35467745/)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