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보이면 사람들은 정말 아쉬워할까?
[소아크론병 명의 최연호의 통찰] ⑨성격의 문화에서 ‘나’
우리나라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미국 작가 수전 케인의 스테디셀러 《콰이어트》에는 미국 역사가 워런 서스먼의 이름이 나온다.
20세기에 들어서며 포드 자동차가 팔리고 백화점이 문을 열며 중산층 가정에 전기가 들어가는 등 미국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문화적 진화를 이루게 되는데, 서스먼은 이 시기가 미국이 ‘인격의 문화’에서 ‘성격의 문화’로 전환되는 때였다고 했다.
서스먼은 인격의 문화에서 이성적인 자아는 진지하고 자제력 있고 명예로운 사람으로서 홀로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했지만, 성격의 문화에서는 대중에게 내가 어떤 인상을 주는가, 즉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고 구분지었다. 그리고 문화의 전환은 사람들에게 결코 회복하지 못할 개인적 불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셈이라고 표현하였다. 지금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19세기까지 미국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한국인은 눈치에 예민하다. 타인의 기분을 맞추는 것에 신경을 쓰고 주어진 상황에서 변화를 빨리 알아채도록 알게 모르게 교육을 받는다. 좋게 이야기하면 눈치란 남의 마음을 잘 읽고 대인 관계나 의사 소통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인격의 문화에서는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지만 성격의 문화에 들어서게 되면서는 눈치 없이 행동할 경우 무례하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남에게 무엇인가? 가족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매우 오래된 질문일 듯 하다.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은 타인이 같이 있을 때 가치가 성립된다. 무인도에 홀로 살아남은 나와 대도시에서 북적이며 살아가는 우리 속의 나는 엄연히 다르다. 무인도에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생존하고 ‘있음’에도 도시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없음’에 불과하다.
미국의 위대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 본성의 가장 밑바닥에는 남으로부터 인정 받기를 갈구함이 자리한다‘라고 했다. 내 주변의 사람에게 나의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것과 동일한 것이리라.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인정 받으며 혹은 인정 받지 못해 괴로워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빠진 경우 남의 시선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고 신경쓰기도 한다. 이를 ‘조명효과’라고 하는데 타인의 시선을 과대평가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삶은 너무 피곤하니 나든 남이든 따르고 싶지는 않다. 대니얼 카너먼은 ‘인생의 그 무엇도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는 동안 생각하는 만큼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남을 신경쓰고 살아간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그 동안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나오게 마련이다. 최근에 이 궁금증을 풀 일이 생겼다. 동료 교수들과 1박2일의 일정으로 워크숍이 있어 모두 짐을 싸 들고 회의장에 모였는데, 주최측에서 사정이 생겨 회의 뒤 밤에 각자 집으로 되돌아갔다가 다음 날 다시 모여야 했다.
그리고 아침에 모두 모여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전날 밤 있었던 각자의 가족들의 반응을 들을 수 있었다. 먼저 한 여교수가 포문을 열었다. “글쎄 어제 집에 갔는데 남편이 새벽에 들어온 거에요. 아침에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서 어떻게 된 거냐고 되묻더군요.” 쿨하게 얘기하는 그 교수 앞에 모두 박장대소했다.
두 번째로 다른 여교수가 이야기를 했다. “아니 세상에 우리 애들이 놀라며 왜 집에 왔냐고 짜증을 내더라구요.” 한탄 섞인 그 교수의 말에 많은 이들이 그럴 수 있다며 공감을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남교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는 집에 도착하니까 갑자기 식구들이 다 좋아하더라구요.”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교수가 말을 이었다. “글쎄 애 숙제를 해야 하는데 프린터에 종이가 심하게 잼이 걸려 빨리 고쳐달라는 거에요. 옷도 못 갈아입고 바로 애 방으로 갔습니다.”
‘있을 때’의 나는 분명히 ‘없을 때’ 또렷이 드러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