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병원들, 떼돈 번다고?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㉕병원 경영의 발달
1977년 소득 1000 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가 실현되면서 당연적용 의료보험이 시작했다. 이 해부터 펼쳐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는 지향하는 범위가 경제발전에서 경제사회발전으로 넓혀져 우리나라 경제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의료 분야에선 아프면 약국에서 약을 사 먹던 시절에서 병의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 시절로 변모했다.
국민의 의료이용률이 증가했고, 곳곳에서 병원들이 세워졌다. 1980년대 초에 정부 재정차관으로 전국에서 39개 병원이 건립됐다. 농어촌개발기금으로 전국의 섬과 산골에도 병원이 세워졌다.
새 병원들이 속속 문을 열고 기존 병원들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병원 경영’이라는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재정차관 병원들은 지방에 건립됐는데,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이어서 의료이용률이 낮았으며 전문의를 고용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었다. 차관 병원들은 창원에 건립한 병원을 제외하고는 재정 적자였고, 1980년대 말에 협회를 만들어 개선책을 강구했지만, 정부에서 빌려준 돈을 갚기가 힘들었다. 결국 차관재정 손실이 불가피했다.
당시 대학병원은 300~500병상, 나머지 병원은 50~200병상 규모였는데 병원경영 문제가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1985년 즈음해 인천기독병원과 전주 예수병원에서 경영이 어렵다고 필자에게 진단과 자문을 요청했다. 이들 병원은 200병상 규모였는데, 병원장이 무엇인가 떠올라 지시하면 직원들은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수준으로 병원을 경영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병원 규모를 늘리다 보니 병원장 혼자서 병원을 경영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당시 병원에서는 병원경영 수련을 받은 중간관리자가 없었던 시절이어서 이들 병원에 병원경영의 ABC부터 알려줘야만 했다.
이 무렵 육군 의무감 경력의 양경호 보훈병원장이 경영이 힘들다고 경영진단을 요청했다. 보훈병원은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있다가 1983년 둔촌동으로 신축 이전을 하면서 적자 폭이 커졌다.
필자가 진단했더니 병원 설계 자체가 부적절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시설만 보더라도 적자가 크게 날 수 밖에 없었다. 복도가 매우 넓었기에 청소와 난방을 하는 데에도 비용이 많이 들 터이고, 환자 재활운동을 위한 수영장은 스포츠 경기장 수준으로 만들어 운영비가 엄청 들 것이 뻔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환자가 몸이 불편하므로 휠체어와 추가 인건비를 인정해야 했다.
필자는 수영장의 환자 사용 시간을 정하고, 나머지는 일반인들에게 사용료를 받고 이용할 수 있도록 건의했으며,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일정 부분의 병원 관리운영비를 추가로 지원받도록 제안했다. 수영장을 공개하자 주민들도 환영했고 부수입도 발생했다. 정부 지원도 수용됐기에 이후 큰 문제 없이 운영되었다.
한편으로는 병원 경영과 행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위기도 번졌다. 1977년 연세대 보건대학원이 개원하면서 병원행정을 최우선 영역으로 하여 필자가 담당했다. 병원 중간관리자, 근무자들이 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매년 여름방학의 주말에는 석사과정 학생들이 지방 병원들을 방문해 병원경영을 진단하면서 관련 사항에 대해 토의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필자는 병원경영, 의료보험, 의료의 질(QA)등에 관련해서 대학병원들, 국립중앙의료원(메디칼센터) 등에서 특강을 요청받았다.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는 주말에 병원장, 중간관리자, 교수 등을 대상으로 모임(피정이라고 함)을 가졌는데, 여섯 번이나 필자에게 특강하도록 요청했고 흔쾌히 응했다.
이와 함께 필자는 독일 EZE(복음주의중앙개발원)에서 재정지원을 받아서 1987년부터 3년 동안 연세대 보건대학원에서 병원관리자 연수교육을 실시했다. 대학원에선 병원 재직자가 석사과정에 입학하면 전액 장학금을 지급했다. 수강자들은 연수과정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강의 내용을 정리해 단행본으로 출판했다(병원행정 강의. 수문사, 1990).
1980년대 초에 보건복지부는 전국을 10개 영역으로 나눠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려 했고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런데 국민이 왜 우리는 서울의 대학병원을 갈 수 없느냐고 극렬 반대해서 정부는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적으로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지방 환자들이 점점 더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에 지방 대학병원들은 해당 지역에 분원을 설립하여 군 지역 주민들이 쉽게 이용하도록 경쟁을 벌였다.
당연적용 의료보험의 실시로 의료수요가 증가했지만 의료수가가 낮아서 병원들은 경영이 매우 어려웠다. 병원들은 장례식장을 운영했고, 의료보험 해당이 되지 않는 건강검진을 하여 부수입을 올렸다. 아울러 매점을 운영 하거나 대여해 재정 적자를 벌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병원들의 외래방문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제일 높다. 우리 국민의 평균수명이 높은데 환자들이 대형병원에 몰리다 보니까 3분 진료가 보편화됐다.
1959년 대한병원협회가 창립할 때 정관에 병원행정 연구조직을 두게 해서 병원경영학회를 두려고 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었고, 1983년 관련 교수들이 한국병원행정학회 창립 총회를 개최했지만 활동이 없었다. 1985년 병원 경영자들이 한국병원행정관리자협회를 창립해 활발하게 활동했다.1995년에 백낙환 인제대 백중앙의료원 이사장이 한국병원경영학회를 창립해 초대, 2대회장이 됐고, 필자가 3대 회장을 맡았다. 이 학회는 병원경영자와 의료경영 학자들이 실무와 이론을 함께 고려하며 한국 병원계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래도 저수가 의료보험 체계 내에서 수많은 병원이 경영 걱정을 하는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안타깝다.
격한 공감의 글입니다.
이 글에 틀린점은 없지만 결국 한계점은 존재한다. 바로 의사면허는 절대 어떠한 경우에도 취소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본인은 병원 관계자로 일하면서 의사들의 다양한 비행 행위를 목격했다. 심지어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 젋은 간호사를 임신시키는 사건도 옆에서 지켜봐왔다. 성폭행을 당한 간호사는 법의 보호를 원했지만 법은 의사의 손을 들어주고, 대형병원은 간호사를 퇴직시키고 의사는 조용히 묻어둔다.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의사도 본 적 있다. 의사는 병원에서 해고당하지 않고 제발로 걸어나가며 오히려 동료 의사를 섭외해 로컬병원을 차렸고 요즘은 지역 유지처럼 떵떵거리고 산다고 한다. 물론 피해자는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해고통지받았다. 어째서 우리나라 법은 의사들에게 관대한가? 의료인력의 부족으로 나라 전체가 몸살을 앓지만 정작 가장 많은 의료인력이 필요한 대학병원은 언제나 재직중인 의사가 언제 로컬로 독립하거나 사설 종합병원으로 옮기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로컬병원은 돈되고 가벼운 질병의 환자는 본인들이 진료하고, 진료하기 까다롭고 질병이 심한 환자는 대학병원으로 소위 퍼낸다. 로컬에는 장비의 한계가 있으니 대형병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의사들이 병원을 차리면 떼돈을 번다는 것은 글쓴이의 말처럼 사실은 아니지만, 일반 소시민이 자영업을 시작하다 망하면 길거리에 나앉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반해 의사들은 다시 페이닥터로 돌아가기만 해도 억대 연봉을 받는다. 이제 이 글의 제목을 다시 보자. 우리나라 병원들이 떼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돌아갈 고액의 연봉이 보장된 자리는 마련된 상태이다. 물론 모든 의사들이 다 이런 생각을 가진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의사들이 전문성을 기르고 다른 의사들보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도록 하려면 안그래도 부족한 의료인력 양성을 막을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양성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