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지하철 집회와 앰뷸런스의 등장
[Dr 곽경훈의 세상보기]전장연 집회와 예산 우선순위
전투와 재난은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이 다치고 중상자의 비율이 높다는 부분에서 매우 비슷하다. 그래서 임상의사에게 힘들고 어려운 과제다. 짧은 시간에 발생한 많은 부상자를 제한된 의료자원을 사용하여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들이닥치는 부상자의 행렬에 평범한 사람은 넋이 나갈 것이 틀림없고, 의료인도 평정을 잃고 감정에 치우친 판단을 내리기 쉽다.
특히 몰려드는 부상자의 무리에서 누구부터 치료할 것인지, 나아가 누구를 포기할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지만 엄청난 심리적 부담이 따른다. 자칫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람’에게 지나친 의료자원을 소모해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비극을 만들기 때문이다.
도미니크 장 라레는 이런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한 최초의 임상의사다. 프랑스의 군의관인 라레는 ‘나폴레옹 전쟁’의 주요 전투에서 야전병원을 책임졌다. 당시 대부분의 군대가 전투가 끝날 때까지 부상자를 전장에 방치한 것과 달리 라레는 최초로 ‘앰뷸런스’란 개념을 도입해 전투가 격렬하게 진행하는 중에도 마차로 부상자를 재빨리 옮겨 치료했다. 그러면서 부상의 정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도 마련했다. 전장의 혼란한 상황을 감안하여 색깔이 있는 카드를 이용해서 이미 사망했거나 치료해도 회복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부상자는 검정, 중상을 입어 신속하게 수술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부상자는 빨강, 두어 시간 뒤 치료해도 생존할 수 있는 부상자는 노랑, 가장 가벼운 부상을 입은 사람은 녹색으로 분류해 이송하고 치료했다.
이런 환자분류법은 매우 효율적이어서 20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대량의 부상자가 생기는 상황에서 널리 사용한다. 다만 라레의 ‘환자분류법’은 아주 특수한 상황을 전제한다. 전투와 재난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재난 같은 상황이 아니어도 의료자원은 제한적이다. 의료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모든 자원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했을 때부터 인류는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에 골몰했다. 과두제, 절대군주제, 입헌군주제, 공화정, 민주정 같은 숱한 정치체제가 등장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격렬하게 대립한 것도 모두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를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이런 갈등은 여전히 진행하고 있지만 ‘개인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전제에는 대부분의 민주국가가 동의한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인권’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에 해당하며 아주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그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문장은 멋지게 들리지만 현실에 적용하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가 기꺼이 인권을 보장해야 하는 ‘개인’에는 멋지고 유능한 사람만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인간에게도 인권을 보장할 수밖에 없다.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현행범과 연쇄살인범에게도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심지어 사형을 확정해도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고통스러운 방식은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범죄자가 누리는 권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런 사람을 의뢰인으로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변호사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범죄자가 아님에도 그런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바로 ‘소수자’다. 중세부터 근대까지 유대인은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성소수자는 오랫동안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간주돼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바리새인이 예수에게 ‘소경’과 ‘앉은뱅이’를 데려와 “이들의 장애는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은 것처럼 고대와 중세에는 죄를 저질러 신의 형벌을 받은 존재로 취급받았다. 근대와 현대에도 그런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아 기껏해야 ‘온정의 대상’으로 여겨질 뿐, 당연히 누릴 권리를 부정당할 때가 많았다.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 독재자는 ‘소수자’를 ‘범죄자’와 함께 ‘사회를 좀먹는 기생충’으로 몰아 강제수용소에 가두어 학살했다. 심지어 미국과 영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장애인에게 피임시술을 강제하거나 통제된 시설에 수용했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애인은 흔히 ‘정상인’이라 불리는 ‘평범한 시민’이라면 당연하게 누릴 권리를 오랫동안 박탈당했다. 그러다가 겨우 조그마한 권리를 얻으면 ‘특혜를 누린다’는 적대적인 웅성임을 마주하고, 그들에게 권리를 나눠준 사람들조차 ‘이렇게까지 편의를 봐주었으니 이제 조용히 만족하라’고 말할 때가 있다.
최근 눈길을 끌고 있는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는 이런 대우를 견디지 못한 장애인의 ‘꿈틀거림’일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불특정 다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시위가 과연 존재할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개선돼서인지 전장연의 시위는 수많은 불특정 다수가 불편을 감수하는 경향마저 보였다.
전장연이 집단행동으로 나선 것에도 밑바닥에는 ‘자원의 배분’이라는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소수자의 목소리는 다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적은 표’ 탓에 뒤로 밀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훨씬 먼저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서구 국가에선 장애인의 인권을 놀랄 만큼 우선한다. 미국의 놀이공원이나 공공장소에 가면 ‘장애인 우선’을 피부로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대통령직인수는 전장연과 소통하고, ‘장애인의 날(4월 20일)’까지 예산과 관련한 답을 내놓기로 했다. 과연 이동권이 생존권인 장애인들의 눈높이에 근접하는 예산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인권과 사회적 자원배분의 관점에서 4월 20일은 대한민국의 이정표가 되는 날이 될 지도 모르겠다. ‘장애인의 날’에 우리는 과연 어떤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도 약자를 배려하는 문화와 의식이 깃들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될 것 같습니다. 내일 좋은 소식이 들려왔으면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