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올림픽 때 수입 美 응급차, 방치된 뜻밖 이유?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㉔88올림픽과 보건의료 시스템 개선
우리나라에서 1986년과 1988년 각각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처음 개최하게 돼 조직위원회를 구성했다.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에서는 엄영진 과장이 파견됐다. 필자와 같은 또래이고, 종종 이야기를 나누는 엄 과장은 전혀 모르는 업무에 차출돼 걱정어린 얼굴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데 파견되었으니 큰일 났다고 하기에 “임 과장뿐 아니라 다른 공무원도 다 해당한다. 올림픽을 치러본 한국인이 없는데 내가 도움을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달랬다. 그리고 예방의학 전문의 수련을 마치고 이듬해(1984년) 봄 군에 입대할 두 사람(손명세, 신동천)이 있으니, 국방부에 올림픽조직위원회 파견을 요청하라고 일렀다.
임 과장은 필자의 권유에 따랐고, 이에 따라 군의관 훈련을 마친 수재들이 파견됐다. 이들은 3개월 군 복무를 했고, 현역 군인으로서 조직위원회에 근무하다가 전역했다. 이 제자들은 틈틈이 내 연구실에 와서 이것저것 묻곤 하였다.
필자는 86아시아경기대회와 88올림픽대회 의무지원 시스템 개발 연구 프로젝트를 발주해 책임자가 됐다. 1억4500만원 규모였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큰 프로젝트였다. 아시아대회와 올림픽대회 의무지원은 잘 진행됐다. 나는 일반 경기 관람은 아시아경기대회 평가요원, 올림픽 자문위원이어서 자문위원증으로 입장했지만 개회식과 폐회식 입장권을 별도 구매해서 구경했다.
조직위원회에 파견된 신동천 대위가 도핑센터를 위탁 운영하는데 외국 전문기관에 맡겨야 하므로 너무 비용이 많이들 것이라고 걱정을 하기에 우리가 직접 하면 비용도 대폭 절감되고 대회 뒤 남은 장비를 활용할 수 있으니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메릴랜드대 의대 교수로 근무하며 메릴랜드 주정부 독성과 책임관으로 있던 박종세 박사에게 SOS를 쳤다. 경기고 2년 선배로 존스홉킨스대 동문이기도 한 박종세 박사는 조국을 위해 기꺼이 일을 맡겠다며 귀국했다.
박종세 박사는 ‘세기의 대결’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한 남자 100m에서 미국의 칼 루이스를 꺾고 우승한 캐나다의 벤 존슨이 약물을 복용한 사실을 밝혀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박 박사는 벤 존슨의 혈액샘플을 야간비행기 편에 캐나다와 미국에도 보냈는데, 양성이라는 회신을 받았다. 국내 검사에서 양성 판정이 나왔지만, 만약의 시비에 대비해 두 나라에 보내라고 필자가 아이디어를 냈고, 박 박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일각에서는 칼 루이스를 띄우기 위해서 벤 존슨을 희생시켰다는 ‘미국 음모론’이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캐나다에서도 인정했기 때문에 시비를 초기에 잠재울 수 있었다. 박종세 박사는 그 후 한국바이오벤처협회 회장, 초대 식품의약품안전청장 등을 맡았다.
서울올림픽, 병원 전산화 시발점 되다
올림픽선수촌병원에서 진료를 하면 건너편 건물에 있는 약국에 가야 했다. 그런데 약 처방전은 간호사가 직접 갖고 가야 해서 힘들고 불편했다. 이에 필자는 처방전을 전산화하는 것을 기획했다. 미국에서 보건정보학을 전공하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에 재직하는 채영문 조교수에게 전산요원을 채용하여 처방정보전달시스템(OCS)을 개발하도록 했다.
선수촌병원은 당시 백병원 김용완 부원장이 겸임했고, 백병원 파견 전공의들이 진료를 하였다. 전공의들이 쉽사리 처방을 컴퓨터로 전송하게 되었기에 환자가 약국에 도착하면 약이 준비돼 있었다.
아울러 의사가 환자의 진료기록을 컴퓨터로 작성, 보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돼 오늘날 전자의무기록(EMR)의 시초가 될 시스템을 개발해 적용케 했다.
이 시스템이 쉽사리 활용되는 것을 체험하고 세브란스병원 부원장 직을 임명받았을 때 자신감을 가지고 병원에 적용했다. 병원에 의사의 진료기록을 전산화하고 의무기록실에 서면 진료기록을 보관케 하는 방안이었다. 서울아산병원은 건립 때에는 민병철 제2대 원장이 필자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종종 만났기에 이를 알려주었다. 민 원장은 세브란스병원 담당 과장을 서울아산병원 국장으로 스카우트해서 업무를 맡겼다. 이에 따라 아산병원도 비슷한 시기(1989년)에 병원 정보 시스템을 도입, 운용했다.
필자는 올림픽 기간에 의무지원 시스템 개발 및 분석, 의무지원시스템 운영계획서 작성, 대량사고 관리대책, 의료장비 및 물자·의약품 선정, 선수촌병원과 후송병원 진료 수준과 방법 분석, 상해보험 시행, 응급차량 운영, 외국인 의무통역 안내서 작성 등 20여 개의 보고서, 자료 등을 준비해 관련기관과 담당부서에 배포했다.
경기가 마무리 될 때까지 연세대 인구 및 보건개발연구소가 담당한 의무지원시스템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바쁘게 업무를 준비하였다. 보건사회부 조병륜국장이 조직위원회에 파견됐는데, 실무 담당은 손명세 대위가 종횡무진하면서 일을 잘 처리했다.
당시에는 응급차량 수준이 낮았다. 지정 후송병원들에서 미국의 응급차량을 구입했는데 초고가였다. 문제는 수입 응급차량이 급정거가 안 돼 앞 차를 추돌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미국에서는 응급차량이 진행하면 일반 차량들이 양보하기에 급정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선 경찰 순찰차가 오면 비켜도 응급차는 그리 하지 않던 시대였기에 문제였다. 올림픽이 종료되자 수입한 응급차는 활용되지 않았다.
올림픽을 개최하려면 대기와 수질 그리고 식품 안전이 중요하다. 당시 영등포는 공장지역이었는데, 맥주공장을 비롯한 숱한 공장을 경기도 동남지역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자동차가 오래돼 배기가스 때문에 환경기준을 채울 수 없어 짝수-홀수제를 채택하여 간신히 통과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하수시설도 잘 정비해 반포에서 낚시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상계동에서는 어린이들이 반바지를 입고 중랑천 냇가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식당과 화장실 개선도 과제였다. 전국에서 공공 화장실을 신축해 깨끗한 화장실 문화의 시금석이 됐다. 식당은 고객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을 볼 수 있도록 벽을 조금 뚫도록 아이디어를 내서 실행토록 했다. 주방 직원이 식사 준비를 하며 모자를 쓰고, 쓰레기통에 뚜껑을 덮고 깨끗이 하는 등 식당 위생환경이 확실히 개선됐다. 88올림픽은 한국과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세계에 높인 성과 못지않게, 우리의 생활과 문화를 몇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