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집 대신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게 됐을까?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⑳장례문화의 변화
옛날부터 집에서 숨을 거두는 것이 기본이었고, 집에서 숨지지 못하는 것을 객사(客死)라고 해 끔찍한 불운, 불행으로 여겼다. 상대방에게 객사하라고 퍼붓는 것은 최악의 저주이자 욕이었다. 객사를 피하려고, 병원 입원 중에 수명이 다 한 듯이 느껴지거나 주치의사가 가족에게 사망이 임박했음을 알리면 환자의 가족은 퇴원을 서둘렀다.
이 때엔 의료진이 환자를 구급차에 옮기고 병원 수련의사가 인공호흡기를 손으로 작동해 환자가 자택에 가도록 도왔다. 그리고 방에 누인 뒤 인공호흡기를 계속 작동하다가 환자가 안정된 듯하게 여겨지면 작동을 중단해 수명을 거두게 하였다. 이렇게 객사를 피하는 것이 1970년대 중반까지 보편적이었다. 환자가 숨을 거두면,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이런 문화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당시까지 장례를 치르려면 망자를 입관해 장의차에 옮겨 싣고 묘지로 간다. 그런데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하자 관을 차에 옮겨 실으려면 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계단이 좁아서 4명이 관을 들고도 내려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관을 엘리베이터에 싣고 올라가기는 했지만, 입관하면 대부분 엘리베이터를 이용 할 수가 없다. 시신(屍身)은 뉘어야만 하므로 입관 후에는 절대로 세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에 입관을 아파트 베란다에서 사다리차로 옮기기도 하였다.
병원에는 시신을 보관하는 냉동 창고가 있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장소는 좁았다. 장례식장은 병원과는 달리 보통 외곽지대에 있는 것이 상례이었다.
그러다보니 점차 병원에서 생(生)을 마감하도록 하고, 장례를 병원장례식장에서 치르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런 변화로 말미암아 필요성에 따라서 점차 병원에 장례식장을 증설 운영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병원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보편화됐다. 상주와 친한 친구들은 장례식장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장례식장에서 고스톱을 치면서 밤을 새는 문화가 번져서 상주가 화투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시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상당수 병원에서 장례식장을 운영하는 것이 생소하거나 격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장례식장을 민간에 위탁 운영케 하는 곳이 많았다가 점점 병원이 직영하게끔 바뀌었는데 병원이 운영권을 되찾으며 진통을 겪기도 했다.
병원은 건강보험 수가가 낮아서 병원경영이 어려웠기에 장례식장을 운영하면서 재정에 보탬이 됐다. 대형 대학병원들이 앞 다투어 장례식장을 확장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특히 1994년 개원한 삼성서울병원은 호텔 같은 장례식장에서 장례지도사와 자원봉사자 등이 친절하게 장례를 도와 상류층 고객들이 몰렸다. 이에 서울의 대학병원들은 최신식 시설로 탈바꿈했고 장례식장의 규모, 시설, 친절 전쟁을 벌였다.
세브란스병원은 1999년 획기적 변화를 시도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고인을 조용히 추모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술, 음식, 도박, 밤샘을 금지하는 ‘4무 장례’를 시도했다. 기본적 식사는 빈소별 접대 공간 대신 공동식당에서 제공토록 했고 오후 11시면 장례식장 입구 문을 닫고 그 전에 문상객을 내보냈다. 그러나 상주와 문상객의 불만이 이어지자, 2008년 개·증축을 하면서 도박을 제외한 세 가지는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과음과 도박이 사라지게 하는 도화선이 됐고, 특히 장례식장에서 고스톱을 하는 문객을 보기가 힘들게 됐다.
이처럼 사회문화 변화에 따라서 병원에서 운명을 하는 것이 보편화하였기에 객사의 개념이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집에서 장례를 치르던 것이 병원장례식장으로 옮겨진 것이 아무런 불편 없이 당연하다고 느끼게 됐다. 최근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가족 중심의 장례식과 온라인 부조 송금 문화를 몰고 왔다. 코로나19 위기가 사라진 다음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이 경향이 그대로 지속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