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위한 지독한 연구... 세계 심장병 지침 바꾸는 의사

[핫 닥터]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구본권 교수

 

“심장동맥 아래 이 부분이 문제인 듯합니다. 이곳을 치료하겠습니다.”컴퓨터 화면을 보여주며 설명하자 70대 환자 A씨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나 “100% 완치를 장담하지는 못 한다”고 조심스레 말하자, 표정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의사가 그렇게 말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고함을 질렀다. A씨는 협심증으로 시술과 수술을 연거푸 받은 뒤에도 수시로 가슴이 아파서 지역 병원을 전전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해서 온 환자. 낙담해서 고함을 지르던 A씨는, 얼마 뒤 진료실로 찾아와서 “이제 아프지 않아요, 살았어요”라고 소리쳤다. 환자는 지난 2일 외래진료를 받으러 와서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구본권 교수(54)의 진료실에는 A씨처럼 다른 병원에서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가 기적처럼 치료받고 새 삶을 선물 받은 환자가 수두룩하다. 구 교수는 관상동맥에서 가지 친 혈관의 병을 연구하는 분야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심장 혈액의 흐름을 측정하는 분야를 개척해서 세계 학계로부터 인정받는 의사다.

구 교수는 현재 서울대병원을 대표하는 ‘스타 의사’이지만, 연세대 의대 출신이다. 그는 연세대 의대 본과 2학년 때 진단학 수업에서 우리나라 부정맥 치료의 토대를 닦은 김성순 교수의 심전도 강의를 들으며 ‘의학 수업이 이렇게 흥미로울 수 있다니…,’ 충격을 받고 마음을 ‘심장내과’에 묶어 버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어도 심장 책을 사서 읽었고, 동료들과 스터디를 하면서 심장 문제에 대한 궁금증을 파고들었다. 인턴, 전공의 때에도 주위에선 모두 “구본권은 심장내과에 갈 것이고 특히 ‘호랑이 의사’였던 김성순 교수의 제자로 부정맥을 전공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전임의 근무 2년차 때 관상동맥질환에 사로잡혀 버렸다. 당시 협심증 환자들이 의식을 잃고 실려 왔다가 스텐트 시술을 받고 뚜벅뚜벅 걸어서 병원을 나가는 모습에 매혹됐던 것. 세부 전공을 바꾸니 김성순 교수 만나기가 두려워서 한동안 피해 다녔다. 그러나 영원히 그럴 수는 없었다. 심장내과 회식 때 자리를 함께 한 스승이 입을 열었다.

“구본권은 요즘 나를 피해 다니는 것 같은데….”
“그럴 리야…”
“내가 자네 스승인데 제자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괴롭히겠느냐? 스승은 제자가 잘 되도록 도와주는 존재인데….”

이듬해 협심증 환자에게 스텐트 시술을 마칠 무렵, 당시 심혈관센터장인 김성순 교수로부터 “내 방에 와라”는 호출이 왔다. 구 교수가 모교에서 교원 자리가 나지 않아 고민할 때였다. 김 교수의 방에는 낯선 신사가 있었다. 스승은 “이 분이 서울대 순환기내과 박영배 과장님이신데….” 구 교수는 그렇게 엉겁결에 서울대병원 교원 면접을 보고, 적을 옮겼다. 지금은 서울대병원에 타 대학 출신이 적지 않지만, 당시로선 파격적 인사였다. 구 교수는 2002년 서울대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듬해 초 미국 의료기기 회사 직원이 심장동맥의 혈액 흐름을 측정하는 기구를 소개하러 왔을 때 눈빛이 빛났다. “이것, 재미있겠는데….” 그는 그해 5월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유럽심장학회 관상동맥 생리학 워크숍에 가서 그동안 책에서만 보던 대가들을 만나 지식을 전해 들으며 이 분야의 매력에 빠졌다. 무엇보다 이 대가들이 10여 년 동안 관상동맥 생리학 분야를 연구하면서 방치한 부분이 있다는 것에 또다시 가슴이 뛰었다. 관상동맥에서 가지 친 혈관의 병에는 연구가 거의 없었던 것.

구 교수는 이 분야의 혈액 흐름을 밤낮 파고들어 2005년 《미국심장학회지》에 “눈으로 보면 좁아져 있어 스텐트 시술이 필요해 보이지만 실제로 피가 잘 흐르고 있어 시술이 필요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세계 학계가 이 논문과 저자에 주목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해외 강연 초청이 와서 기꺼이 응했지만, 반발이 적지 않았다. 학회 때마다 세계적 대가들이 “그럴 리가 없다,” “측정을 잘 못 한 것 아니냐?” 등의 질문을 쏟아냈다. 구 교수는 “내가 틀렸다면, 사기꾼이 되는데…”하며 이론을 다듬고 데이터를 보충했다. 밤에 외국 학자가 목을 조르는 악몽에 식은땀을 흘리며 깬 적도 있다. 외국에서 구 교수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임상 결과가 뒤를 이었고, 구 교수의 이론은 유럽심장학회 가이드라인에 반영되면서 정설로 자리 잡았다.

구 교수는 2007년 관상동맥의 세계를 더 폭넓고 깊게 공부하기 위해 미국 스탠퍼드대 심장혈관공학연구소의 피터 피츠제럴드 문하로 연수를 갔다가 또 다른 삶의 전기를 맞았다. 당시 우연히 비행기나 승용차 출시 전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성공률을 높이는 ‘컴퓨터 유체역학’을 접하고 심장에서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스탠퍼드대 출신인, 밀워키의 마르퀫 대학교 공대 존 라 디사 교수가 이 분야 연구의 적임자로 보였다. 이메일로 공동연구를 타진했더니, “관심 있다”는 답신. 반나절 비행기로 날아가서 만난 다음 피츠제럴드 교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컴퓨터 유체역학을 배워야겠는데 가능하겠느냐고. 미국 스승은 의외로 반색했다. “그래, 학자라면 이런 새로운 걸 해야지. 항공료, 숙박비, 식대에 렌터카까지 비용은 내가 부담할 테니 파고 들어봐라.”

구 교수는 마르퀫 대학 공대생들에게 관상동맥에 대해서 가르치고 석사, 박사 논문 심사위원까지 하며 공동연구를 해서 좁아진 혈관의 압력 차이를 측정, 심장근육에 도달하는 혈액의 흐름을 파악하는 새 방법을 정립했다. 이전까지 관상동맥질환의 정확한 예후를 알려면 환자를 입원시켜 약물을 주입시킨 뒤 고가의 장비를 통해서 심장의 분지혈류예비력(FFR)을 측정해야만 했는데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FFR을 파악하게끔 공식을 만든 것. 그는 연수 중 이 연구로 스탠퍼드대의 최고 탐구상(Best investigator award)을 받았다.

구 교수는 2009년 귀국 뒤 라 디사 교수의 스탠퍼드대 스승이었던 찰스 테일러 교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최근에 의학에 컴퓨터 유체역학을 적용하는 회사 하트플로((Heartflow)를 만들었는데, 내 한국인 제자들이 당신이 최고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추천한다.” 구 교수는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만으로 컴퓨터가 관상동맥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획기적 기술을 공동연구했다. 첫 임상시험 결과를 유럽중재시술학회에서 발표해 혁신대상을 받았으며 이번에는 한 달에 두 번 꼴로 초청강연을 다녀야 했다.

구 교수는 자신의 성과가 호기심과 끈기 덕분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또 지금은 옛날과 달리 의학자가 무역회사의 상사원처럼 세일즈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국제 다기관 관상동맥 생리학 검사 연구는 세일즈의 승리였다. 그는 2012년 8월 5일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관상동맥학회에서 한중일 대형병원 19곳의 대표들을 조찬모임에 초청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연구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제대로 연구하려면 수백억 원이 든다. 우리 학자들의 우정으로 연구를 하자”고 호소했고, ‘FFR 프렌즈 연구’가 출범했다. 연구결과는 《유럽심장학회지》에 게재됐고, 후속 연구논문 20여 편이 《미국심장학회지》, 《서큘레이션》 등 최고 권위 학술지에 실렸다. 구 교수는 각 병원 의학자들이 보내준 영상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한 결과를 투명하게 공유했다. 참여자들의 이름을 기여도에 따라 논문에 빠짐없이 수록한 것은 물론이다.

구 교수는 또 5개국 11개 병원이 참여한 다국가 임상연구인 ‘에메랄드 연구’의 책임자로서 심근경색증을 예측하는 연구를 진행해서 그 결과를 유럽중재학회에 발표했으며, 현재 이 연구의 20배 규모로 세계 60여 개 기관이 참여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의 의학자들은 이 연구결과에 따라서 CT 영상에 따라 급성 관상동맥질환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무기들을 갖추게 돼 이로 인해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는 환자를 격감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구 교수는 지금까지 500편에 육박하는 SCI 논문을 발표했으며, 세계 의학계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국내 최고 의학상인 분쉬의학상, 아산의학상 등 숱한 상을 받았다.

그는 제자가 “연구보다는 진료에만 매진하겠다”고 하면 “의학자는 진료를 제대로 해서 환자들 살리기 위해서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며 설득한다. 구 교수의 연구실 벽에는 늘 난제인 공식과 그래프(위 사진)가 붙어있다. 틈만 나면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문제를 풀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구 교수의 환자 가운데 두려움 속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다가 와서, 악몽에서 벗어난 환자가 적지 않은 것도 이런 철저한 고민 덕분에 가능하다고 동료 의사들은 말한다.

    이성주 기자

    저작권ⓒ 건강을 위한 정직한 지식. 코메디닷컴 kormedi.com / 무단전재-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댓글 0
    댓글 쓰기

    함께 볼 만한 콘텐츠

    관련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