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의 첫 내한공연은 왜 19금이었나?
[이성주의 건강편지]
제 1493호 (2021-10-11일자)
호모 사피엔스는 왜 헛된 신념으로 화내며 살까?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무대. 대형 화면 속의 타임머신이 폭음과 함께 툭 튀어나와 무대 위에 올라오더니, 우주복을 입은 주인공이 내렸습니다. 그 주인공은 우주복의 헬멧을 벗으면서 신곡 ‘Scream’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오늘 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첫 내한공연에 들어갔습니다.
황제는 이전에도 내한공연을 할 뻔 했지요. 1989년 통일교와 세계일보가 마이클의 부모를 접촉, 한복을 입고 애국가와 한국가요도 부르는 공연을 4차례 하기로 설득했지요. 마이클은 애국가와 한국가요는 부르지 않는다는 절충조건으로 계약서에 서명하고 마케팅용으로 한복 사진까지 찍었지만, 공연료 흥정 때문에 결국 무산됐습니다.
1993년에는 문화체육부가 공연을 불허했습니다. 공연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 시민단체들이 격렬히 반대했고, 문체부 예술진흥국은 “국제문화교류에 일익을 담당하는 등 일부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새 정부가 일련의 사회개혁조처를 진행 중이고 근검절약을 생활화하고자 합심노력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바람직하지 않다”고 발표했습니다.
1996년에도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대한주부클럽연합회, 기독교청년연합회 등 44개 단체로 이뤄진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 반대공동대책위원회’는 “아동성추행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던 가수를 수십억 원의 외화를 낭비하면서 초청공연을 갖는 것은 국민정서를 해치는 행위”라며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실력행사에 들어가서 주최 측에 끝없이 항의전화를 했고, 후원사에 협찬 취소를 강요했습니다. 또 예매를 하지 못하도록 운동을 펼쳤습니다. 고건, 박홍, 김지길 등 사회 원로로 구성된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도 반대에 합류했지요.
젊은이들로 구성된 ‘전국 팬클럽연합’이 이들의 주장에 맞서서 ‘상식’을 얘기했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공연은 무산 직전에 청소년관람금지를 조건으로 겨우 허가됐습니다. 기획사는 수작업으로 표를 판매해야 해서 매진에 실패했습니다. 티켓의 60~70%만 팔렸고 공연장은 곳곳이 비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공연은 뜨거웠습니다. 잭슨이 크레인에 올라 ‘Earth Song’을 부를 때 한 남성이 뒤따라 올라와서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졌지만, 황제는 노래를 부르며 크레인의 남성을 끝까지 보호해서 해외에까지 화제가 됐었죠. 어린이들과 함께 평화를 노래한 ‘Heal the world,’ 태극기와 성조기 등의 국기를 배경으로 부른 ‘History’를 끝으로 막이 내리기까지 우리나라 공연역사에 남을 콘서트가 펼쳐졌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참석했고 이듬해 6월 25일 마지막 해외 투어를 서울에서 열었지요. 잭슨은 스티븐 시갈, 머라이어 캐리, 보이즈 투먼 등 세계적 스타들과 우리나라의 유진박, HOT 등과 함께 공연을 마치고, “통일이 되면 또 다시 와서 공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2009년 급사하는 바람에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하게 됐습니다.
유튜브에는 1996년 마이클의 첫 내한공연 실황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 무렵 다른 나라에서 펼쳐진 공연영상과 비교하면 공연 반대운동과 청소년 금지가 한 편 코미디 같이 느껴집니다. 당시 공연을 격렬히 반대했던 시민단체, 종교단체 인사들이 지금도 같은 생각일지 궁금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일에 가치를 부여하고 분노할까요? 몇 달, 몇 해만 지나면 신념의 허상을 깨닫는 것을 되풀이하면서도 사람들은 왜 허상에 휘둘릴까요?
그야말로 총알같이 지나가는 삶, 서로 고마워하고, 서로 북돋워주고,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도 모자란 시간을 왜 허상 속에서 화내며 허비할까요? 사람들은 과연 ‘호모 사피엔스’일까요?
[오늘의 음악]
오늘은 황제의 노래 두 곡 준비했습니다. 첫 서울공연에서도 사실상 피날레를 장식한 곡이죠? ‘Heal the World’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숨진 뒤 2014년에 발표된 ‘Love Never Felt So Good’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