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치료비 안 내고 도망가면 사기죄일까?
[서상수의 의료&법] 병원비 ‘먹튀’와 사기죄 성립요건
애초부터 돈이 없으면서도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값을 내지 않고 도망치는 ‘무전취식’을 속어로 ‘먹튀’라고 하고, 옛날 경상도 일부 지역에선 ‘먹고땅’이라고도 불렀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부터 ‘먹튀’를 계획했다면 사기죄가 적용될 수 있고, 상습적으로 무전취식했다면 고의성이 인정돼 사기죄가 성립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다면 병원의 치료비를 내지 않고 도망가도 사기죄가 성립될 수 있을까?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면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은 뒤 진료비를 내지 않고 몰래 퇴원하는 사례들도 늘어난다. 일부 의료기관에선 환자가 진료비를 납부할 것처럼 병원을 속여 입원 및 치료하게 함으로써 병원으로부터 입원비, 수술재료비, 소모품비, 진료비 등 재산상 이익을 편취하였다는 이유로 사기죄로 고소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 1970.9.22. 선고 70도1615 판결에서 “치료비 채무의 이행을 모면하기 위하여 피고인이 거짓말을 하고 입원환자(처)와 함께 병원을 빠져나와 도주했어도 그것만으로는 피고인이 위 치료비의 지급채무를 면탈받은 것은 아니라 할 것이므로 사기죄가 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런데 위 사건의 원심인 부산지방법원 70노1235 판결은 “치료비를 지급할 의사와 능력이 있지만 한번 부담하게 된 치료비 채무의 이행을 임시도피하기 위해 피고인이 거짓말을 하고 입원환자와 함께 도주한 것”으로 판단했다.
즉, 애초부터 돈이 없으면서도 치료비를 내지 않고 도망치려고 계획을 세웠다고는 보지 않았고, 환자가 도망을 가도 병원 측이 치료비 채무를 면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료비 채권은 소멸하지 않아 손해가 없다는 논리로 사기죄의 성립을 부정한 것이었다.
사람의 생명이 돈보다 존중돼야 한다는 입장과 앞서 본 대법원 판결의 취지에 따라 애당초 돈이 없어 치료비를 지급하지 않고 도주하려는 내심이 있었어도 실무적으로 사기죄를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의료지원을 아끼지 않는 일부 의료기관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진료비를 받지 못하는 금액이 상당한 액수에 이르기 때문에 의료계에서는 의료기관의 희생만 강요하는 것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돈이 없어 치료비를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여 입원치료를 받으면서 치료비를 지급하지 않은 채 다른 환자의 물건을 훔친 환자는 사기죄 등으로 구속한 사례가 있다.
A씨는 입원약정서 등에 환자나 보호자의 전화번호를 허위로 기재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장기간 입원했다. 그는 개별 화장실, 주방시설, 보호자용 침대, 멀티비전과 오디오 등 서비스가 제공되는 상급병실까지 신청해 사용한 뒤 ‘먹튀’했다. 이때엔 단순히 치료비를 부담하는 것을 넘어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받는 부분에 대해 추가적인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뜻을 병원 측에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A씨는 치료비 지급채무를 면탈하는 것을 넘어, 진료 외의 병원 측의 특별한 고급서비스(혜택) 제공에 대한 이용요금 역시 면탈했기 때문에 사기죄로 구속된 것이다.
응급환자가 경제적 여유가 없어 치료비를 낼 형편이 없다면 국민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시행하는 ‘응급의료비대불제도’를 활용할 수 있지만, 범위가 제한적이다.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없도록 국가적·사회적으로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넘어 치료 후 ‘먹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병원뿐 아니라, 건강보험 재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돼 어려운 형편에서도 성실히 치료비를 내는 환자들에게도 간접적 피해를 끼치게 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현실적 대책도 마련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