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봐주는 비디오'가 애 잡는다.
“동영상이 이렇게 해로운줄 몰랐어요.” 주부 김모씨(31·서울 강남구 역삼동)가 병원 정신과 진료실에서 흐느끼며 한 말. 두살바기 딸이 뇌발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진단받은 것. 딸이 ‘엄마’ ‘아빠’를 발음하지 못하고 엄마의 눈을 마주치지 않을 때만 해도 ‘설마’했다. 의사는 “오빠를 따라 틈만 나면 영어학습 DVD를 본 것이 화근”이라고 말했다. ‘젖먹이 비디오 증후군’. 엄마가 젖먹이 자녀를 ‘아이의 눈높이’에서 보듬으며 키우지 않고 TV나 비디오에 애를 맡겨둬 정서와 지능발달에 장애가 온 것.
●학습비디오 더 안좋아●
◇어떤 병?
수년전부터 TV와 비디오의 위험을 경고해온 미국소아과학회(AAP)는 최근 “만2세 미만의 아이에게 TV 비디오 등을 보게해선 안된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언론은 이 내용을 보도했고 국내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미국의 일만은 아니다. 엄마들이 ‘애보는 비디오’나 ‘학습비디오’를 경쟁적으로 보여주는 우리나라의 경우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다. 말이 지나치게 늦거나 이상한 행동을 보여 병원에 온 4세 미만 아이 중 20∼30%가 비디오 증후군에 해당한다. '애보는 비디오’가 애를 잡고 있는 셈.
비디오 증후군을 보이는 아기들은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혼자 노는 것을 즐긴다. 처음 TV에 빠져들 땐 밥을 먹으면서도 TV에 눈을 떼지 않고 누가 불러도 거의 돌아보지 않는다. AAP는 젖먹이 비디오 증후군이 △주의력결핍장애 △과잉행동장애 △언어발달장애 △사회력적응장애 등 정신장애로 이어진다고 보고 광범위한 증거를 수집 중이다.
●‘뇌회로망’ 형성 방해●
◇왜 생기는가?
뇌를 보면 해답이 나온다. 신생아의 뇌는 태어나자마자 ‘주체적’으로 주변환경과 반응하면서 1000억개의 신경세포와 50조∼1000조개의 시냅스를 조합하고 필요없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방법으로 ‘뇌회로망’을 만든다. 양전자단층촬영(PET) 분석 결과 아기의 뇌는 생존본능 성욕 식욕등을 맡는 ‘고피질(古皮質·다른 동물에게도 있는 뇌로 변연계가 대표적) 회로망’을 먼저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논리적 사고와 고도의 판단 등을 주관하는 ‘신피질(新皮質·사람답게 만드는 뇌로 대뇌피질 전두엽이 대표적) 회로망’을 만든다.
젖먹이의 뇌는 엄마의 사랑이 담긴 말을 배운 뒤 이 말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회로를 만든다. 이 회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뇌회로망 전체가 뒤죽박죽이 돼 평생 정신적 문제를 안고 살 위험이 크다. 그런데 ‘정서’가 빠진 TV나 비디오의 언어는 회로를 만드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
게다가 TV 카메라의 현란한 화면은 뇌신경 회로 형성에 혼란을 준다. 평상시의 자연스런 자극을 시시한 것으로 느끼게 해 회로망 형성을 방해하기도 한다. 또 TV나 비디오는 아기의 뇌를 수동적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특히 주입식 학습비디오가 해롭다. 무엇보다 TV와 비디오는 아기가 부모나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연스런 자극을 받아들일 기회를 빼앗기 때문에 큰 문제.
●2세미만 TV 끊도록
◇부모는 어떻게?
2세 미만의 아기에겐 TV나 비디오를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 부모도 참고 보지 않는다. 도저히 TV를 보지 않을 수 없다면 글자 대신 사람이 많이 나오는 화면을 보여주고 엄마가 아기 옆에 꼭 붙어있으면서 자꾸 말을 걸어야 한다. 이미 TV나 비디오에 많이 노출돼 아기가 말이 늦거나 혼자서 노는 것을 좋아하면 무조건 ‘끊어야’한다. 밤에 비디오테이프를 치우고 최소한 3,4개월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자주 안아주고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 함께 논다. 그래도 아기가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거나 말이 늦으면 즉시 병원에서 진단을 받도록 한다.
살인, 강간, 공갈사기, 부녀자성추행, 세상의 악역이라는 악역들이 TV 속에서는 죄다 정의의 사도로 나오니 애가 자라나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